자장면에 관한 명상 8회
정말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한국은 너무 많이 변해서 입이 딱 벌어졌다.
넓고 깨끗한 인천 공항에서 나는 마치 발레슈즈를 신은 것처럼 미끄러지며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의 가벼운 호주머니와 무겁고 추운 마음으로 우리 가족이 떠났던 그 눈물의 김포공항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만 있었다.
마중을 나온 삼촌 부부가 슬픈 얼굴로 뒤돌아서지 못하고 오래도록 서 있던 기억이 가물거렸다.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내린 뒤, 짐이 한참만에 나오느라 찾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하나도 피곤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뱅뱅 도는 짐 가방들을 바라보며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 나오지 않는 이민가방을 찾느라 발을 동동 굴렀던 그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때처럼 내 가방은 나오지 않았고, 계속 나온 가방이 돌고 또 돌아 모두 낯익은 누군가의 가방처럼 느껴질 때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내 가방이 나오는 게 보였다. 가방들은 신기하게도 주인들을 닮아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의 가방과 욕심이 없는 사람의 가방,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과 불안한 사람의 가방, 인색한 사람과 검소한 사람과 사치스런 사람의 가방, 살겠다는 주인의 의지가 가득 들어가 있는 가방과 어디 높은 곳에서 눈 질끈 감고 떨어져 죽고 싶은 사람의 가방, 결국은 모두 다 남의 것 같지 않은 뱅뱅 도는 가방들을 뒤로하고 달랑 내 가방 하나를 끌고 공항 출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내 눈앞에 마중을 나온 K의 모습이 보였다. 헐렁한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그와 내가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주머니 사정으로나 몸과 마음의 건강상태로나 예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나는 후회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섰던 그 봄날들이 갑자기 내 맘에 아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못해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이 세상에는 나아지는 사람도 드물게 있는 법이다.
소위 출세를 하면 머리가 무거워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거나, 돈이 많이 생기면 그저 더 돈밖에 모르거나, 이름이 많이 나면 그 얼굴에 으스대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쳐다보기도 싫거나 대충 그런 식인 것이다. 반대로 루저가 되면 비굴한 표정이 온몸에 흐르거나 뭔가 얻어 볼 요량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하거나 그러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거지왕자 K는 거지였을 때도 언제나 당당했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온몸의 표정에 자연스러운 겸손이 묻어났다. 이 사람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었나? 그동안 사람을 몰라보았던 걸까?
나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전부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가우면서도 서먹서먹한 표정으로 뭐가 제일 먹고 싶으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기껏 자장면이 제일 먹고 싶다고 말했다. K는 웃으면서 자장면은 나중에 먹고 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자장면 다음으로 떠오른 건 어릴 적 먹었던 냉면의 맛이었다. 우리는 종로 한일관에 가서 갈비와 냉면을 먹었다. 입맛이 달라진 건지 옛날 맛 그대로는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숫자 이천 년 대, 미국에 있는 한국 음식점들은 한국보다 더 훌륭하면 훌륭했지 못하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설렁탕도 냉면도 자장면도 그럴 것이었다. 한국의 곳곳에 ‘옛날 자장면’이라고 씌어 있는 음식점 간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옛날 생각이 났다. 그중에서도 삼촌과 같이 먹던 자장면의 기억이 오래된 흑백영화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옛날 자장면은 정말 옛날 맛일까? 그 이름은 마치 나를 위해 특별 주문한 자장면처럼 느껴졌다.
K가 나를 위해 얻어놓은 아파트에 짐을 풀고,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맨 처음으로 한 일은 K의 누나 부부가 설립한 전문대학에 가서 면접을 보는 일이었다. 일단 나는 그 학교에 취직되었다. 두 번째로 한 일은 H를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K와 함께 가자고 했더니 그는 혼자 가서 만나라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호텔 중식당에 앉아 있는 H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왜 K가 혼자 만나라고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에 박제가 된 천재가 힘없는 노인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믿는 쪽이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린 그의 병색 짙은 모습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표정을 추스르며 나는 그를 위로할 말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지 못했다. 젊은 발레리나 아내가 그렇게 세상을 버린 뒤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파킨슨씨병이 엄습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고 거들어줄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그는 일그러진 입술을 씰룩이며 그 외로운 날들 동안 K와 나, 우리들이 많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던, 요괴인간 세 사람이 만나 자장면을 먹었던 90년대 초 뉴욕에서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떠올리며 그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때처럼 자장면이라도 같이 먹고 싶어 중식당에서 만나자고 했다는 그는 내가 자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월의 필름을 뒤로 돌려도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 만일 K가 아니라 H가 나에게 실험을 하자고 했다면 우리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까? 그렇게 우리가 얽혔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굳이 구멍을 뚫지 않아도 부드럽게 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구멍을 뚫기 싫은 사람은 뚫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길은 뚫린 골목이 적당하다 해도 막다른 골목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기 싫은 사람은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를 맞기 싫은 사람은 우산 속으로 숨어도 좋을 것이다. 그 중의 한 우산이 무서워하는 우산이라도 좋을 것이다.
“아내가 그렇게 죽고 난 뒤 나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까짓 게 뭐라고 명품 가방 오백 개를 못 사줄까. 그 어린 아이 같은 여자를 목매달게 하다니. 그런 자책감에 사로잡혀 매일 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 잠 안 오는 밤들에, 술을 먹고 잠들어 선잠을 자다가 깬 외로운 새벽에 문득 당신들이 떠올랐어요.”
그가 말한 ‘당신들’의 지칭은 ‘당신’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했다.
정작 자장면은 그에게 금지된 음식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장면 한 그릇 같이 먹고 싶었다고 H는 말했다. 하지만 젓가락질을 하기 힘든 그는 누룽지탕과 딤섬 한 접시와 나를 위한 자장면 한 그릇을 주문했다. “맛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 옛날 우리 셋이 먹었던 그 코리아타운의 중국음식점 생각이 많이 나요, 탕수육과 자장면과 고량주, 그 맛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힘들게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손을 떨며 숟가락을 제대로 입 안으로 가져갈 수 없어 그는 계속 음식을 흘렸다.
나는 일부러라도 안보는 척하느라 자장면을 비비는데 열중했고, H는 계속 만두 속살을 흘리며 딤섬을 먹고 있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뚫고 그가 말을 꺼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주는 수면제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삼켰어요, 그럴 때 마다 병원의 하얀 침대에서 깨어나곤 했어요. 나를 죽지 못하게 방해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죽기 전에 나를 한번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은 인사가 아닌 진심으로 들렸다.
가장 쉽게 죽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관해, 그날 오후 우리가 나눈 대화는 남이 듣기에 농담처럼 들렸다. H가 말했다. “히틀러가 마지막 순간에 먹었던 독일제 알약 한 알만 있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나는 히틀러의 억만 분의 일 만큼도, 죄지은 일이 하나도 없는 그의 죽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애꿎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