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7회
세월은 정말 꿈같이 흐른다. 아니 꿈보다 더 꿈같이 흐른다. 십 년도 이십 년도 삼십 년도 눈 깜짝할 새 흘러버린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려보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직선으로 남는다.
이쪽 끝과 저쪽 끝의 거리는 어릴 적 친구네 집처럼 정말 그리 멀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날 백 살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못다 살고 간 시간까지 다 살아주고 싶었다.
오래 살아서 그들의 한을 다 풀어주고 원수도 다 갚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을 묶어서 거대한 분량의 책을 만들어 그 책을 밟고 올라가 달까지 별까지 가고 싶었다. 별들의 사전에서 사라진 명왕성의 어느 창문을 열고 어서 오라고 삼촌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21세기가 도래했어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서른이 넘도록 남들 다 하는 결혼은 여전히 남의 일이었고,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을 간단한 영어로 써 내리는 일은 이력이 나서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억울한 내 청춘이 흘러가고 있었다. 주말에는 영화를 세 개씩 보거나 부모님을 뵈러 갔다. 아버지는 퀸즈 플러싱의 한인 타운에서 이 십여 년 동안 작은 세탁소를 경영해서 번 돈으로 뉴저지에 커다란 저택을 샀다. 수영장이 딸린 집은 거대하고 훌륭했지만 식구가 없는 탓에 너무 고적했다. 아무리 큰 집을 샀다지만 꼬깃꼬깃한 잔돈푼 달러들을 벌어들이는 일은 개미의 행적과도 비슷했다. 몇 년 만에 몇 배로 올라버린 한국의 아파트 투기에 비하면 너무 허무한 일이었다. 미국에 와서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은 어쩌면 한국을 떠나기 전 살았던 집 한 채 걸머쥐고 있는 것보다도 남지 않는 장사였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또 한탄이 끝이 없었다. 돈을 벌면 또 뭐하나. 내세울 명분도 없는데. 아버지 역시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처럼 작은 행복을 누리는 일에 굉장히 무능했다. 명분이 중요한 한국 남자의 특성을 조금도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일요일도 없이 돈을 벌었지만, 돈을 벌어봤자 늘 불행했다. 아까운 아들놈, 하나밖에 없는 자식 같은 동생 다 잃어버리고 아직도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원망스러워했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남 보기에 그럴듯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시시한 일에나 매달려 있는 게 늘 못마땅했다. 차라리 뉴저지에 있는 새 저택에 들어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너 좋아하는 글이나 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큰 저택에 드리운 아버지의 어둠과 동거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맨해튼 미드 타운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혼자 사는 일에 익숙했다. 사실 나는 억울하게 사라져가는 시간의 틈새로 틈틈이 한국어로 소설 비슷한 걸 썼다. 어릴 적 한국에서 자랐던 기억들과 너무 일찍 죽어서 새가 된 오빠의 추억과 아직도 아버지의 꿈에 나타나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말하는 삼촌과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삼촌이 죽은 뒤 재혼을 해서 살다가 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분식집을 경영한다는 풍문으로 들은 삼촌의 옛날 아내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두꺼운 부피의 소설이 되고도 남았다. 그 누구의 삶인들 소설이 되지 않으랴?
어릴 적 살던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난 뒤 소파니 책장이니 벽에 붙은 그림마저 빨간 딱지가 다닥다닥 붙었던 그 겨울의 풍경도 내게는 모두 소설의 재료들이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내 마음과 몸과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그리운 한국어로 소설 비슷한 걸 쓰는 일이 행복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나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랜 삼촌의 옛 아내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삼촌의 무덤을 만들어주려고 우리 가족이 서울에 나갔을 때 삼촌의 아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미 재혼을 한 뒤였다. 수소문을 해서 겨우 연락이 된 삼촌의 아내는 우리를 끝까지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다른 가족이 생겨서이기도 했겠지만 삼촌과 관련된 그 어떤 기억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때문인지 모른다. 그 많은 세월이 흐른 이제야 나는 그녀가 백 프로 이해가 되었다.
삼촌의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아버지는 전화로 편지로 수없이 애걸을 했지만 삼촌의 아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내가 삼촌의 아들을 떠올릴 무렵 정말 거짓말처럼 나는 삼촌의 옛 아내로부터 뜻밖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아버지의 집으로 온 내 이름 앞으로 부친 편지였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 다 큰 숙녀가 되었을 텐데. 워낙 삼촌이 사랑하던 조카라서 나도 그 얼굴을 가끔 떠올리곤 했어요. 삼촌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 이를 악물고 세상 살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착한 사람과 결혼해서 우리 욱이를 그 호적에 넣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 세월을 살아냈어요. 그러다 팔자가 박복해서 어쩔 수 없는지 남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지 또 몇 해가 흘렀네요. 욱이 녀석이 벌써 대학을 다녀요. 삼촌을 닮아 훤칠한 게 잘 생긴 인물에다 착하고 성실하고 공부도 잘해요. 이제쯤은 모든 걸 말해 줄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네요. 아버지의 조카면 사촌인가? 하나밖에 없는 사촌 누나 얼굴도 좀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편지를 적어요. 수소문해서 주소를 아느라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네요.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어머니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정말 면목없지만 용서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나는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아보았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실타래도, 응어리도 있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그날 오후 또 한 장의 반가운 편지를 받았다. 땅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K로부터의 이메일이었다. “오랜만에 메일 씁니다. 생각보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땅은 많았습니다. 돈은 안 되지만 시골에 십만 평이 넘는 산이 두 개나 되고, 서울 외곽에 4층짜리 허름한 건물도 하나 있더라고요. 거기서 나오는 세를 받아 먹고사는 일은 그럭저럭 살아갈 만합니다. 시골 산은 별 쓸모가 없어서 그냥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길을 내고 살들 말든 내버려두고 있는 상태고요. 그런데 나랑 어머니는 다르지만 부자한테 시집간 누나 한 분이 학교를 하나 만들었어요, 영어를 잘하는 선생님을 찾기에 당신을 추천했어요, 올 수 있으면 냉큼 와요. 추신, 소식이 끊긴 H선생을 찾으러 갖은 애를 다 쓴 끝에 겨우 찾았습니다. 꾼 돈 다 갚았어요, 후후. 그런데 그분 몸이 많이 안 좋아요.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문득 우리들 ‘요괴인간’ 세 사람 중 둘은 서울로 떠나고 나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들을 만난 지 참 오래되었지만, 그 그림자들은 마치 잊혀진 나 자신의 모습처럼 내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다가 기억 속의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서둘러 서울행 비행기 표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