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5회
그로부터 오래도록 H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왜 한 번쯤 연락을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뉴욕 주립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아주 오래전 H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보기 훨씬 전의 일이다. 유학을 온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아주 우연히 그녀가 다니고 있던 ‘스태튼 아일랜드’의 작은 대학에서 H의 ‘니체 이후 이십 세기 철학’ 강의를 들었다. 두 학기를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강의를 끝냈다. 수강하는 학생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어는 유창했으나 그 속의 내용은 알아듣기 난해했다. 그날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은 나와 내 초등학교 동창생 그녀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백인 남자 학생들 다섯 명쯤, 도합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 강의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수업을 들으며 나는 죽은 삼촌의 목소리와 너무나 닮은 H의 목소리에 놀랐다. 마치 삼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나는 그가 강의하는 내내 그 내용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부드럽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 아무렇게나 흐트러지지 않을, 하지만 꽉 막히지 않은 열린 목소리, 내가 그의 목소리를 꿈꾸는 듯 듣는 동안 그는 한국의 시인 ‘이상’의 시를 영어로 소개하고 있었다. “제일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뚫린 골목이 적당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라도 괜찮소.” 내가 미국에 오기 전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놓았던 이상의 시를 영어로 소개하는 그의 강의는 정말 난해했다. 강의 도중 아무 생각 없는 백인 남학생들이 수군거리며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수군대는 영어를 번역하면 대충 이런 말이었다.
“13명의 아이들이 뭐 길에서 돼졌다고? 13이라는 숫자가 재수 없는 숫자니까 그렇지.”
나는 이후로도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 삼십 분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바다를 건너야 했다. 배를 타는 내내 자유의 여신상은 점점 가까워졌다가는 도로 점점 멀어지곤 했다. 이후로도 나는 마음이 꽉 막힌 막다른 골목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혼자 아무 목적 없이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를 타고 갔다 그냥 돌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H의 강의를 떠올렸다. ‘길은 막다른 골목이라도 괜찮소.’ 그 구절은 그 시절의 나에게 조금쯤 위로가 되었다. 나 자신이 막다른 골목 그 자체였다. 인디언의 이름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마치 인디언 이름 “구르는 천둥”처럼 그 시절 나는 나의 이름을 ‘막다른 골목’이라 명명해 마땅했다. 적어도 문학을 전공한 인간이라면, 아니 청소년 시절 책 냄새를 좀 맡아본 사람이라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톨스토이보다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그려내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을 좋아해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위선자 톨스토이는 위대했다. 그가 위선자였다는 사실은 그저 역사적인 풍문뿐이었던 건 아닐까?
“이 세상을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조건은 용서다”라고 말했던 사람은 톨스토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톨스토이가 만일 우리가 들은 대로 위선자가 아니었다면?
좋은 놈의 알파벳은 위선이고 나쁜 놈의 알파벳은 위악일까? 왜냐하면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지금도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위선은 위악보다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위선의 이름으로 수재 의연금도 불우이웃돕기도 그 많은 고아들의 해외입양도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위선이 선과 착각될 정도로 ‘짝퉁’일 때 나는 그 위선마저 선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 위선은 인간의 영역이고 위악은 신의 영역이다.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연재해의 끔찍한 맛을 보게 해주는 신이야말로 위악적인 존재일 터였다. ‘박제가 된 천재와 거지왕자와 성냥팔이 소녀’ 그렇게 마지막으로 우리 셋이 만났던 그해 겨울 이후, 거지왕자 K는 어쩐 일인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끔 나를 만나러 뉴욕으로 날아왔다. 눈부신 봄날이었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이 그저 모르는 남자가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그 봄날 오후 얼떨결에 K와 나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갔다.
그 영화의 내용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 동물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내용을 줄거리로 한 영화였다. 영화 속에서 외로운 두 남녀는 저녁을 같이 먹고 포도주 한잔을 기울이다가 결국은 같이 자게 되는 스토리였다. 그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날이 밝은 훤한 세상 아래서 전날 밤의 일이 그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각자의 길로 헤어져 간다는 내용을 담은 쓸쓸한 영화였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자는 게 대수라면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같이 자는 일은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타고난 감성과 취미와 성장과정의 차이와 인간의 격과 체온의 온도 차이와 그렇게 많은 인자들이 얽히고설켜 그들은 소위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K와 나의 그날 밤의 행보는 그 영화의 내용과 비슷하게 진전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우리는 소호의 프랑스 식당에서 와인 한잔을 곁들여 송아지요리를 먹었다. 우리가 그날 먹은 그 송아지를 멀리서라도 직접 보았다면 절대 먹지 못했을 아니 남이 먹는 걸 구경조차 못했을, 여리고 부드럽고 순하고 연한 슬픈 송아지 고기의 맛이었다. 식당을 나오면서 우리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바람에 취해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팔짱을 끼었다. 그와 내가 단둘이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사이에 늘 끼어 있던 H의 부재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봄바람 결을 타고 K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실험 한 번 해봅시다.”
내가 “무슨?”하고 말문을 열기도 전에, 그는 다짜고짜 맨해튼 소호의 훤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놀래서 벌어진 내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았다. 그때 그 순간 나는 K의 혀가 내 혀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문득 그 혀의 주인이 K가 아니라 H였으면 했다. 그런 생각이 든 것도 그때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소비하는 존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정의를 다 다르게 내렸지만, 그날 밤 내게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였다. “나는 후회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게 희미한 의식 한가운데서 그날 밤 나는 K와 일을 치렀다. 나는 그 일이 유난히 힘들었다. 과연 꼭 그래야만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꼭 귀에 구멍을 뚫고 귀걸이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여자들은 구멍을 뚫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뜨거운 쇠꼬챙이로 코를 꿰이는 것과도 비슷한 경험, 그게 여자들의 첫 경험이다. 꼭 사랑하는 사람과 그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선입견은 내게는 애당초 없었다. 그러므로 내게 ‘첫 경험. 첫 남자’의 기억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어본 자장면 맛의 기억보다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경우 구멍을 뚫는 일에 일체의 낭만적인 감정은 스며들 틈이 없었다. 구멍을 뚫어보지 않은 남자들은 모른다. 한 달에 한 번 피를 흘려보지 않은 남자들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영원히 그 피가 멈춰버리는 폐경을 경험할 수 없는 남자들은 모른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남자들은 모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 때나 아무 여자 앞에서나 발기해본 적 없는 여자들은 모른다. 어느 어두운 갈대 수풀 속에서 지나가는 바람에 강간의 유혹을 느껴보지 않은 여자들은 모른다. 아무 여자 앞에서나 발기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서 발기하지 않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여자들은 모른다. 그리하여 그 아무도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는 행위가 ‘위선’이라면,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상태가 바로 ‘선’인 것이다. 마치 치과 의자에 앉아 이빨을 뽑는 순간처럼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들이 내 고통의 사이사이로 지나갔고, 구멍을 뚫는 행위야말로 유물론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치과 의자에 앉아 처음 이빨을 뽑듯이 나의 처녀는 그렇게 버려졌고 그렇게 새 이빨로 다시 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또 엉뚱하게도 초등학교 이 학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무렵 구정 때인가 우리 가족은 친척 집에 세배를 가는 길에 버스를 탔다. 휴가를 나온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가 탄 버스에 올라탔다. 그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어데 갈낀데?” 다른 하나가 답했다. “응, 구멍 파러가.” 또렷한 서울 말씨인 “구멍 파러 가.”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붕붕 울렸다. 이후로도 시험 시간에 아무런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도 나는 그 말이 떠올랐다. “구멍 파러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자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어디 개가 죽어서 묻어주려고 구멍을 파나보지.” 그 군인아저씨들은 정말로 개를 묻으려고 구멍을 파러 갔을까? 아니면 사람을 묻으러? 아니 모르는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아니 죽은 우리 삼촌을 묻어주기 위해서?
나는 무덤 하나 없는 삼촌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내 모든 생각들을 컴퓨터 모니터를 끄듯 종료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보다는 고통이 아름다운, 창밖에 모르는 벚꽃 잎이 아프게 떨어지는 눈부신 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