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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에 관한 명상 4회
몇 년 후, 1990년대 중반 어느 해인가의 크리스마스 저녁에 우리 세 사람은 뉴욕 맨해튼의 한인 타운에 있는 그 중국 음식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간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종종 소식을 주고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거지왕자 K는 여전히 근사한 모자를 쓰고 근사한 명품 옷을 걸친 귀족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사실 그는 뉴욕에 부동산을 좀 갖고 있던 H에게 적지 않은 빚이 있었다. 꽤 많은 돈을 K에게 빌려주었다지만 H는 단 한 번도 돈을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뉴욕에 살던 시절 H는 언제나 우리에게 밥을 사주고 영화와 연극을 보여주고 그 비싼 뮤지컬도 보여주고 택시비도 쥐여주곤 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죽은 삼촌이 떠오르곤 했다. 아무에게서나 쉽게 돈을 빌리는 K는 “돈을 갚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 가서 갚으면 되지 뭐.” 늘 그런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K가 엉뚱한 서두를 꺼냈다. “발레리나랑 결혼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첼로를 하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딱히 무슨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있을까? 가운을 입은 의사라든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든지. 어릴 적에 본 삼촌이 입고 있던 군복이 멋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어릴 적에 미국으로 건너온 터라 군복은 그저 모든 것이 절제되고, 동시에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외향적인 멋스러움으로 남아있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온 다음 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건에 내 사랑하는 삼촌이 연루되어 있었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우리 삼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아직 어렸던 내가 이런 정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미국에서 김재규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니 삼촌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희망을 붙잡고 우리 가족은 그해 겨울을 났다.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몹쓸 놈들은 미국이라고 아버지는 피를 토하듯 말을 했다. 그러던 이듬해 5월 18일 광주 항쟁이 발발했고, 엿새 뒤 1980년 5월 24일에 삼촌은 상관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말 슬픈 개죽음이었다. 훗날 나는 인터넷을 통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유언을 발견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나는 내란죄로 죽으니 예비역 중장은 아니고 장관도 아니지만 복권이 되면 살아날 수 있으니 우선은 나무로 묘비를 세우되 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여 달라. 나는 사후에도 재규 장군이라고 불리고 싶다. 만약 내가 복권이 되어 의사니 수호신이니 없는 말이 붙게 되면 이름 앞에 붙여 ‘의사 김재규 장군 지묘’라고 하면 된다. 내 사후에 존칭을 붙이려는 사람이 있거든 ‘김재규 장군’이라고만 하라고 하고 존칭이 싫거든 아예 ‘김재규’라고만 하라고 하라.” 그렇다면 억울하게 죽은 우리 삼촌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광주 항쟁이 발발한 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본 한국 군복의 이미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1980년 5월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 뉴스는 연일 그 현장을 보도했다. 그중에 삼촌이 없는 게 나는 너무 다행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삼촌의 처형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우리 가족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켜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상부의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 군인은 군인이 아닐 터였다. 삼촌 역시 명령을 수행하다 죽었다. 나의 끊임없는 생각을 깨고 H가 말을 꺼냈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아니라 그냥 무덤 그 자체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당신들은 몰라요.”
H는 마흔이 넘어서 처음 한 결혼, 그 결혼이라는 줄을 잘 못 섰다. 길에서 부딪치는 아무하고나 했어도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H의 젊은 발레리나 아내는 굉장히 사치스런 소비형의 여자였다. 한 달에 명품 백 서너 개를 사고 나면 H의 월급은 바닥이 나곤 했다. 일단 그는 발레리나의 신용카드를 압수했다. 명품 백을 살 수 없게 된 발레리나는 날개를 잃은 천사처럼 밥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굶다가 밤이 되면 초콜릿이나 케이크 한 상자를 다 먹어치웠다. 게다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뜬눈으로 지새기 일쑤였다. 그녀는 하얀 발레복을 입고 발레 슈즈를 신고 나가 거리를 서성이곤 했다. 어쩌면 그녀는 발레리나가 아니라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발레복을 가끔 입어보는 그런 여자였을지 모른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지 않았던 여자가 어디 있으랴? 발뒤꿈치를 들고 새처럼 걸어가는 여자,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소녀가 어디 있으랴? H는 이혼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문득 엉뚱하게도 H가 마술을 하는 장면이 잠시 오버랩 되었다. 무대 위의 H는 발레리나를 상자에 넣고 예리한 칼로 상자를 두 토막 낸다. 그런 다음 H가 상자 속을 열면 거짓말처럼 발레리나가 새처럼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내 백일몽 속에 보이는 풍경은 그게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발레리나가 무대 위에 쓰러져있었다.
우리가 맨해튼의 그 중국 음식점에서 탕수육과 자장면을 먹고 늘 그렇듯이 열 시도 채 되지 않아 헤어진 그날 그 다음날, 아니 그 다음날 나는 H의 전화를 받았다.
“이혼을 하자고 아내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H의 젊은 발레리나 아내는 남편의 이혼 선언을 들은 날 밤, 그 가늘디가는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나는 그때 그 시간, 영어로 번역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책을 읽고 있었다. 스무 살에 러시아 전선에 배속되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의 허위를 고발하는 글을 써 사형선고를 받은 청년 보르헤르트.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풀려나 다시 전선으로 배치되어, 1945년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극도로 악화된 건강으로 스물여섯 젊은 나이로 죽어 간 그의 글에 나는 깊이 빠져 있었다. 나는 삼촌을 떠올리는 그 어떤 이미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민들레꽃」이라는 제목을 단 보르헤르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문은 내 뒤에서 닫혔다. 사람 뒤에서 문이 닫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아주 잠겨지는 일도 또한 상상될 수 있는 일이다.”
H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 아무도 그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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