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3회
우리는 다음 해 크리스마스도, 또 그다음 해 크리스마스도 만나지 못했다. H는 대학 전임 교수 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났고, K는 일자리를 얻어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나는 퀸즈에 있는 부모님과 함께 1992년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우울한 크리스마스였다.
아버지는 남은 우리 가족 세 사람이 모이면 언제나 삼촌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놈이 살아있었으면 우리는 벌써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야. 별 서너 개는 단 장군이 되었을 텐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형님을 모실 거라고 늘 그랬었거든.”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갈수록 아버지의 삼촌에 관한 추억은 한두 방울의 눈물로 변해 급기야는 통곡으로 변했다. 너무 이른 오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온 오래된 한이 뒤섞여 흐르는 아무도 발조차 담글 수 없는 슬픔의 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가혹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 자신의 세탁소를 경영하면서부터 우리 집 형편은 먹고살 만해졌다. 그래도 아버지의 슬픔은 늘 그때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그놈을 데리고 오는 건데. 그 불쌍한 놈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오기 일주일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삼촌은 우리 가족 모두의 선물을 껴안고 우리 집에 왔다. 나의 삼촌에 관한 기억은 바로 그날에 머물러 있다. 삼촌은 내게 파커 만년필과 빨간 지갑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삼촌이 준 만년필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미국에 와서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그 만년필로 삼촌에게 편지를 썼다. 컴퓨터 자판기로 모든 글씨를 쓰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만년필로 세상에 없는 삼촌에게 편지를 썼다. “보고 싶은 삼촌, 미국은 살 만한 곳이 아니야. 나는 삼촌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매일 낯선 도시에서 헤매는 꿈을 꿔. 시험을 보았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하얀 백지로 답안지를 내는 그런 꿈, 꿈에서 깨면 식은땀이 흘러, 눈이 오는데 구멍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꿈, 근데 그 구멍마다 전갈이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전갈에 물리지 않으려고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며 도망을 쳐. 그때 근사한 군복을 입고 어깨에 별을 단 삼촌이 나타나 나를 구해주는 거야. 삼촌 보고 싶어.” 그런 식의 편지였다.
그때의 어린 나는 매일매일 살아내는 일이 암담했다. 영어를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너무 내성적인 탓에 친구도 한 명 없었다. 삼촌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충실한 부하로 그의 작전 명령을 아무런 회의 없이 따르기로 하기 전까지 내게 늘 답장을 보냈다.
“구멍에 발이 빠지는 걸 무서워하지 마. 네 발이 빠지는 그 구멍 속에 삼촌이 버선을 넣어두었어. 그 속에는 별 사탕이랑 인형이랑 네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가득 들었어. 그러니까 구멍에 빠지는 걸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삼촌은 그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죽었다. 인생에 있어 줄을 잘 서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미국에 와서 배운 게 있다면 바로 그 줄서기였다. 편지 한 장을 부치러, 햄버거 한 개를 사러, 커피 한 잔을 사러 사람들은 매 순간 긴 줄을 서 있었다. 그 아무도 아무런 불평 없이 긴 줄을 서 있는 게 나는 너무 신기했다. 아무리 서 있어도 줄이 줄어들지 않자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그냥 줄에서 탈퇴하고 만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는 게 보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줄을 잘 선다. 하지만 그건 편지를 부치거나 팝콘이나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시시한 줄을 설 때의 이야기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줄을 서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날 때부터 우리는 가늘디가는 줄 하나를 붙들고 태어난다.
이른바 탯줄이다.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줄서기를 시작한다. 돈 많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게 아무래도 유리하겠지만, 길게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그 어떤 줄서기도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각자의 운명인지 모른다.
줄서기는 말하자면 복불복이다. 수송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삼촌은 가끔 방과 후 학교 앞으로 찾아와 내게 자장면을 사주었다. 화교가 운영하던 적선동의 그 중국음식점은 물만두와 자장면이 전공이었다. 입속에 들어가면 살살 녹던 그 물만두와 자장면의 맛을 나는 수십 년이 흐른 뒤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중국음식점에서 다시 맛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을 간 우리 가족은 늘 삼촌과 함께 가던 그 음식점이 서울 적선동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로 이사를 온 것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나이 든 중국 음식점 주인아저씨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도 삼촌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서 아직 살아있다면 큰 인물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 잠시 흐린 안개가 끼었다. 삼촌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삼촌의 사형집행 후 늘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서는 삼촌이 아버지를 부른다고 했다. “꿈속에 면회를 갔는데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으니 자장면이 먹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부랴부랴 자장면을 사 들고 갔는데 이미 사형집행이 끝났다는 거야. 죽은 시신이라도 보여 달라고 애걸을 해서는 그놈을 보았는데, 글쎄 죽은 그놈 목구멍에서 자장면 국숫발이 계속 뽑아져 나오는 거야. 자장면이 식도 안으로 넘겨지지 않고 목구멍 가득히 막혀 있더라고, 한없이 국숫발이 뽑아져 나오는데…” 아버지는 그런 식의 악몽에 수십 년을 시달렸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사형수의 마지막 메뉴’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떠올랐다. 미국의 감옥에서는 사형 집행 전 사형수에게 먹고 싶은 게 무언지 물어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준다. 사형수의 마지막 음식을 요리하는 요리사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그 필름은 나의 뇌리 속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감자튀김과 스테이크는 미국인 사형수들이 제일 선호하는 마지막 음식이었다. 감자튀김을 먹고 사형 집행 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의 목구멍 속에는 삼키지 못한 음식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 필름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우리 가족은 삼촌의 무덤을 만들어주고자 한국에 갔다. 하지만 삼촌의 재가 뿌려진 북한강 가에서 한없이 울다가 그냥 왔다. 이제는 먹고살 만해진 아버지의 뿌리 깊은 슬픔은 죽을 때까지 조금도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왜 삼촌은 아버지의 꿈속에 나타나 늘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내 꿈속에 나타난 삼촌은 마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삼촌은 목구멍 속에서 끊임없이 자장면 국숫발을 뽑아내는 마술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쉬워 보이는지 나는 두 손이 으스러져라 박수를 쳤다. 꿈에서 깼을 때는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H의 전화를 받은 건 삼촌 꿈을 꾸고 울면서 깨어났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억양으로 서울의 학교에 자리를 잡았고, 게다가 곧 결혼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대는 자기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린 발레리나라고 했다. 내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섭섭하다고도 했다. 문득 꿈속에서 마술을 하던 삼촌과 H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H가 상자 속에 발레리나를 가두고 칼로 베는 장면이 떠올랐다. 상자 속의 발레리나가 아무 탈 없이 무사한 걸 보여주면서 마술은 끝이 난다. 나는 멀리서나마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