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2회
우리는 다음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또 같이 지냈다. 세월이 일 년이 흘렀어도 우리는 일 센티미터도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 단지 한국말로 외로움을 나눌 친구가 없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한인 타운에 있는 예의 그 중국음식점에서 어득할 무렵에 만났다. 그해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탕수육과 자장면과 고량주 한 병을 시켰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셋 중 아무도 술을 마시지 못했다. 한국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지 못한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 우리에게 한인 타운의 중국 음식점에서 일하는 웨이터가 권해준 고량주는 너무 독했다. 우리는 그 독한 고량주를 조그만 잔으로 한두 잔씩을 마셨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고량주를 한 잔 마시고 얼굴이 불그레해진 K가 불쑥 말을 꺼냈다. “중학교 1학년 때 유학을 떠나온 지 2년 만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거지왕자가 되었던 거죠. 그때 이미 육십이 넘으셨던 아버지는 아들을 얻으려고 젊은 어머니를 집에 들여 저를 낳았습니다. 집안에 발언권 하나 없는 가엾은 존재였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달마다 부쳐오던 돈도 끊기고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고생이라고는 조금도 해보지 않은 듯 거지 왕자의 인생 항로는 그의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은 한국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한국말을 주고받을 친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나와 H가 그의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을 것이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계속 유태인 행세를 했다. 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은 정말 유태인처럼 보였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서도 한국 여자랑 자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괴로워했던 거지왕자 K는 늘 귀족 취향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돈이 아무리 없어도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걸치고 좋은 구두를 신어야 했다. 돈이 없으면 남에게 꾸어서라도 그렇게 했다.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 박제가 된 천재와 거지왕자와 나, 우리 세 사람의 공통점은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랑불능증 환자였다는 점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구멍을 뚫는 일에 공포를 느꼈다. 구공탄에 뚫려 있는 아홉 개의 구멍은 내게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스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남들 다 뚫는 귀의 구멍도 무서워서 못 뚫어 귀걸이를 할 수 없었다.
여섯 살 땐가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아버지가 죽은 개를 묻으려고 삽으로 땅을 파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암으로 죽은 오빠가 발가락을 다 잘라내고도 어느 구멍 사이로 새 살이 돋는 것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남자와의 인터코스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늙으면 이 세상에 다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건 섹스지요.” 듣기만 하고 있던 H가 말을 이었다. “내 애인은 흑인과 백인 혼혈의 재즈싱어였어요. 그녀는 바에서 노래를 불렀지요.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나는 늘 발기했어요. 언젠가 발기가 안 되기 시작한 날에도 그녀가 노래를 불러주기만 하면 나는 발기했지요. 그녀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고, 잠 안 오는 밤에는 헤로인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을 하곤 했어요. 그래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나 그러면서요.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마약을 끊게 해주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한국에 대학교수 자리를 알아보러 갔던 며칠 사이 코카인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모든 울음은 사실은 자기 설움에 우는 거지요. 그녀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지요. 지금도 저는 그 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있어요.” H의 안경 안쪽에 김이 서렸다.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그 시절 생각보다 그는 그렇게 늙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갑자기 그가 마치 삼촌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솔직한 그의 고백을 들었기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문득 나는 삼촌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동생이었던 삼촌은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산타클로스 옷을 입고 해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아왔던 삼촌은 육군 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삼촌이 제일 좋았다. 삼촌이 들고 온 커다란 버선 속에는 별의별 선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곰 인형과 소꿉놀이 세트와 초콜릿 등등… 삼촌이 결혼한 뒤에도 크리스마스엔 어김없이 선물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씩씩한 군인 아저씨 우리 삼촌이 결혼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한 사람이 그 삼촌이었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바로 일 년 뒤, 삼촌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충실한 부하로 젊디젊은 삶을 마감했다.
삼촌의 사형집행 전 아버지는 한국에 나가려 했지만, 어머니가 발목을 붙들고 울어대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영주권도 시민권도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가면 미국에 다시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친구가 경영하는 뉴욕 퀸즈의 한인 타운 세탁소에서 뼈가 빠지게 일만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나, 우리 네 식구는 삼촌의 사형 집행 전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아버지는 동생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해 괴로워했고, 어머니는 남편을 말린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우리 남매는 삼촌이 그리워서 밤새도록 울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옴 직한 내 사랑하는 삼촌의 억울한 죽음이 그날 밤 문득 내 맘에 사무쳤다. “나는 커서 삼촌 같은 남자한테 시집갈 거야.” 어릴 적 나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삼촌의 젊디젊은 아내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거지왕자와 박제가 된 천재와 구멍 뚫는 일을 무서워하는 나, 우리 세 사람은 불어터진 자장면의 마지막 한 가락까지 다 먹고, 고량주 몇 잔에 취해 음식점을 나와 한인 타운의 어둑한 골목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마르스 블랙도 아이보리 블랙도 아닌 자장면에 비벼진 중국된장의 검은 색깔은 신비로웠다. 마치 별 하나 없는 뉴욕 한인 타운의 밤하늘처럼. 둘 중 아무도 취기를 핑계로 내게 치근대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날 밤 나는 그 둘 중 아무와라도 함께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천국보다 낯선 곳으로, 삼촌이 죽어간 사형 집행장으로, 너무 젊어서 죽은 오빠별을 찾으러, 지금 이곳이 아닌 어느 곳이라도 좋았다.
눈은 내리지 않았고, 각자 따로따로 자신의 썰렁한 아파트로 돌아가는 우리 셋은 그날 밤도 역시 가까워지고 싶지만 한 치도 더 가까워질 수 없었던, 만화 영화 <요괴인간> 속의 고독한 주인공 ‘뱀. 베라. 베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