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1회
창밖에는 사각사각 눈이 내리고 있었다. 1990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어색한 침묵을 뚫고 K가 말문을 열었다. “콜걸이랑 자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저는 가슴이 큰 여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딱 돈 준 만큼 더도 덜도 없습니다. 많이 주면 다 할 수 있지만 적게 주면- 후후…”
그는 조금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게 얼마나 외로운지 아십니까? 특히 백인 여자는 나 같은 남자를 더 외롭게 합니다. 그런데 외로울 때마다 그 일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나는 풍만한 백인 여자와 그가 엉켜 있는 그림이 언뜻 떠올랐다. 그날 밤, 우리 셋은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본 일본 만화 영화의 주인공들 같았다. 사람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요괴인간들이었거나, 성별의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 개의 섬이었다.
1990년 뉴욕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날 밤 가족도 애인도 없는 그 두 남자와 나는 더 이상 좁혀질 거리의 1퍼센트의 가능성조차 없는 완벽한 섬이었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타고 갈 배 한 척도 없었다. 그저 따로따로의 거리를 지니고 앉아 외롭게 자장면을 먹었다.
우리 중 나이가 그중 많은 H가 말을 이었다. “뉴욕에서 자장면을 먹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지요.”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유학을 왔을 땐 한국 음식점은 한 군데도 없었다.
미국의 자장면이란 한국의 화교들이 한국에 정착한 뒤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만든 독특한 음식이었다. 같은 이름의 중국 음식이 있다고 해도 그 맛은 무척 달랐다. 자장면이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하지만, 삶의 어떤 시기를 1980년대 이전을 통과해온 사람들에게는 짜장면이라고 해야 실감이 난다. 자장면을 좋아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어린이들은 손들어라.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당신이 일흔 살이든 예순 살이든 마흔 살이든 열 살이든, 모든 세대를 가로질러 우리를 한 지점에 모이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장면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을 통과해왔다는 거다. 지금은 비록 건강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먹지 않는다 해도 자장면은 우리의 추운 영혼을 어루만져주던 고마운 음식이었다. 장갑보다 철모보다 휴전선보다, 비무장지대를 건너 들려오는 불쌍한 어린 적군의 대남방송 “모두가 행복한 조국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품 안에서 행복하십시오”보다 더 다정한 맛의 기억 자장면…
하지만 1990년 크리스마스 저녁, 뉴욕의 한국 촌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었던 두 남자는 대한민국의 성장통과의례인 입시지옥을 통과하지도 않았고, 군대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중학교 때 유학을 온 그 당시만 해도 부잣집 도련님들이었다. 대한민국 조기유학 1세대라고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중에 말없이 끼어 있는 나도 중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왔다. 언어란 습득 능력도 잊어버리는 정도와 속도도 사람마다 많이 다르다. 내 경우는 떠나왔던 그 지점의 한국말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 밤 함께 했던 두 남자도 나와 같았는지 모른다. 나이 차이가 꽤 있었던 우리 세 사람은 각자가 떠나왔던 바로 그 시대의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말은 서로에게 가끔씩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셋은 심리치료 클리닉에서 처음 만났다. 우연히 우리 세 사람은 그곳에 온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중에 내가 제일 젊었다.
그리 살갑게 친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친분이 있는 우리 셋은 90년대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렇게 별 볼일 없이 한 세 번쯤 같이 지냈다. 의미 있게 느껴지던 시간만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에도 나는 그들과 함께 보낸 1990년대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가끔 생각이 났다.
아무도 묻지 않는데, 마치 심리 치료를 하는 중인 듯 두 남자는 슬슬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눈 때문이었거나 우리 사이를 흐르는 어색한 침묵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너무들 외로웠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먼저 비밀을 털어놓거나 먼저 선물을 주는 방법이다. 그렇게 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날 밤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 관해 고백했다. 비겁하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남자의 말을 듣기만 했다. 물론 돈을 주고 남자를 사 본 적은 없었고,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사람이고 어머니는 아일랜드 사람인 남자와 3년 동안을 사귀었다.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지만, 남자랑 자는 일이 너무 무서워서 인터코스는 하지 않고 패팅만 했다. 어느 날 지치고 지친 남자는 너같이 이기적인 여자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며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여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녀를 버리는가? 하지만 처녀성은 버려지는 게 아니다. 불 속의 쇠처럼 단련될 뿐이다. “이런 얘기 재미없으시죠?”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치 해 버린 듯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보기에도 두 사람은 특징이 두드러진 얼굴을 갖고 있다. 그 중 K는 아주 비싼 외국종 강아지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미간이 좁고 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입의 크기는 너무 작았다. 그래서 그는 수염을 기르는지 몰랐다. 그의 수염은 마치 공작부인의 모자에 단 깃털처럼 아주 작은 온풍기 바람에도 흔들렸다.
삶이란 깃털처럼 가볍고 동시에 콘크리트벽처럼 무겁다. 깃털과 콘크리트벽 중에 너는 어떤 것을 갖겠는가 물으면 나는 물론 깃털을 선택할 것이었다. 깃털이 되어 한없이 날아가 200년 전쯤의 하와이 마우이 섬에 떨어져 그곳의 원주민 추장의 부인이 되어도 좋았다.
그곳에서도 나는 인터코스를 거부하여 쫓겨났을까? 하지만 H라면 콘크리트벽이 되어 수없는 힘센 주먹들을 박살 내고 싶었을 거였다. 벽에 부딪혀 깨지지 않는 생명이 어디 있으랴? 마치 나의 혼자 생각을 듣기라도 하듯 H가 말했다. “나는 깃털을 달고도 날지 못하는 콘크리트벽이요.” 아니 정말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시집을 출간한 적이 있는 소년 시인이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십니까?” 문득 나는 그런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을 이 상황에서 번역하자면 “조기 유학을 떠나 온 고학력 루저들의 슬픔을 아십니까?” 정도로 될 것 같았다. 오래전에 죽은 시인 이상이 창 밖에서 윙크하며 속삭였다.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히틀러가 금연 운동의 창시자라는 걸 아십니까? H가 말했다. “정말 앞선 인간이었지요. 그가 미술학교에 합격만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우리 모두 그 말에 공감했다. “자고로 그림은 미친 자들이 하는 짓이거든요.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천추의 한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는 철학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철학이라는 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등신 같은 주절거림은 아닌지… 나는 중학교 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었습니다. 미친 건 틀림없었지만 그놈은 멋있었어요. 그 멋있는 미친놈은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이 세상을 캔버스 삼아 맘대로 붓질을 해댔으니 세상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히틀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이겁니다.” 나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먹고 남긴 불어터진 자장면을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었다. 자장면 같은 사랑, 자장면 같은 죽음, 적당히 비벼놓으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그런 맛, 어쩌면 그 외로운 크리스마스 저녁에 K와 H, 그 두 사람 다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건 그로부터 십오 년쯤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