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의 청문회
자- 청문회가 시작됩니다.
당신은 살아온 동안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남들 탓이거나 운이 나빴다고 말이지요. 누구나 그렇듯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학교 다닐 때 데모 한 번 한 적이 없으시네요. 평생 택시 기사를 하시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데모하는 놈들하고는 말도 섞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정말 당신은 하숙집에 숨겨달라고 숨어들어온 친구를 냉정하게 내쫓았습니다.
나중 얘기지만,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 뒤 국회의원이 된 그 친구를 찾아가 당신은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옛날 얘기로 돌아갈까요?
당신은 친구의 애인을 뺏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제일 친한 친구가 군에 입대한 날, 그의 애인과 둘이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갔다가 그날 하루 종일 술을 퍼마시고 모텔에 갔습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그 이후 그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다시는 받지 않았군요. 정말 비겁하네요.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 년쯤 뒤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군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고요. 죽었다 해도 물론 당신 탓은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는 여자였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당신이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 아시지요?
어쨌든 당신은 대학 4년 동안 한 여자를 사귀었습니다. 그 여자는 당신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였고요. 미팅에서 만난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요? 졸업을 며칠 앞두고, 당신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안이 가난한 그 여자에게 당신은 아이를 떼라고 돈을 줍니다. 그 여자 울고 울고 또 울다가 당신 곁을 떠났습니다.
그 여자를 기억하세요? 그 뒤 당신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던 살 만한 집의 여식과 결혼을 합니다. 참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군요. 당신은 살면서 도둑질을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제일 처음엔 어릴 적 문방구에서 딱지나 구슬을 슬쩍한 거였습니다. 그까짓 것은 일도 아니라 들키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2학년 겨울, 당신은 책방에서 책을 한 권 훔칩니다.
여자 친구를 주려고 했다고요? 때는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책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취향으로 책을 골랐습니다. 『변증법적 상상력』, 그게 당신이 훔친 책 제목이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리가 없겠지만. 그냥 제목이 여자 친구의 취향인 듯해서 당신은 그 책을 골랐습니다. 아마 마르쿠제, 아도르노, 뭐 이런 인물들의 글을 모은 비평 철학서였던 걸로 압니다. 책을 슬쩍 들고 책방을 나서는데 당신은 점원에게 들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각서를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직업과 나이 전화번호 등등을 적는데, 택시기사였던 아버님 직업을 대기업 중역으로 바꿔치기하는군요. 아버지가 창피했나요? 다음 해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요. 성질이 지랄 맞은 나이 든 점원은 당신의 머리를 책으로 후려갈기며 말합니다.
“이 새끼야. 네 애비가 회사 중역이면 뭐해? 이렇게 어려운 책은 또 읽어서 뭐해? 아버지 모시고 오던지 경찰서로 가든지 양자택일해.” 아마도 그의 비위를 건드린 게 틀림없었나 봅니다. “돈 있는 놈들, 좀 배운 놈들, 다 뒈져라.” 나이 든 점원의 얼굴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으니까요. 겨우겨우 빌어서 당신은 책방을 무사히 걸어 나옵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주머니에 돈은 한 푼도 없고, 당신은 늘 그렇듯 여자 친구한테 선물 하나 못해주고, 그날도 밥을 얻어먹습니다. 정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당신에게 떡볶이와 오뎅, 소주 한 병을 사주었습니다. 정말 착한 여자였지요. 지금 당신은 그녀를 떠올립니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당신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대기업에도 다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생전에 은행이 최고라고 늘 말씀하시던 대로 당신은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은행에 취직을 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 일했고, 승승장구로 승진이 순조로웠습니다. 미국 지사에 지점장으로 나가 있던 시절만 해도 아무 걱정이 없었지요. 서울로 돌아와 웬만한 강남의 아파트도 사고, 쓸 만한 승용차도 굴리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네요. 그때 그 일만 아니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정말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군요. 꽤 규모가 크던 처남 회사에 왕창 대출을 해준 뒤로 당신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처남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당신은 대출의 책임을 지지 못해 명예퇴직 당합니다. 당신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했는데, 조직은 당신을 하루아침에 일회용 폐품처럼 내다 버리네요. 그 뒤 퇴직금으로 주식을 해서 반은 날리고, 남은 돈으로 친구들과 합작을 해서 만든 회사도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나마도 다 날리는군요. 애지중지 마련한 집도 빚으로 넘어가 버리고,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렸다고요.
자- 이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근무하던 은행 빌딩 옥상 난간 앞에 서 있습니다. 때는 어스름한 저녁이고, 당신은 뛰어내리려고 눈을 질끈 감습니다.
까짓 눈 질끈 감고 뛰어내려 버려요. 뭐가 무서운가요? 전 대통령도 뛰어 내렸는데요. 뭐.
그는 정말 뛰어내렸다. 한없이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디가 이승이고 저승인지 구분이 잘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이었으면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