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4회 (최종회)
그렇게 오랜 시간 그녀는 서울에 가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2년에 한 번씩은 딸들을 보러 미국에 오곤 했다. 정말 아버지가 다녀 간지도 굉장히 오래되었다.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건강이 나빠진 후론 비행기를 오래 탈 수가 없었다. 자식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외국에 나가 살고 있었고, 사업이 기울자 친척들이 하나씩 둘씩 다 떠나간 뒤 아버지는 늘 외로워했다. 그날도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돌아오다가 다행히 집 앞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뇌졸중이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부모의 입회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아버지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나이 많은 미국인이라니.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뒤척이며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그는 딸이 결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는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의 평생의 선행이 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오래전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이별을 한 뒤, 다시 만난 서울은 너무 많이 변해있어서 그녀는 현기증이 났다. 어릴 적 누가 쳐다볼까봐 노심초사하며 길을 걷던 기억이 거짓말 같았다. 이제 서울에서도 뉴욕처럼 아무도 그녀의 의수를 쳐다보지 않았다. 사실 얼핏 보면 진짜 손과 흡사한 질감의 가짜 손을 만져보지 않으면 다 그냥 넘어갈 것이었다. 그 손이 가짜인지를 알아보는 이들은 오히려 어린아이들과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나가 본 명동 길에서 아직도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이 온몸으로 기어가며 구걸을 하는 장면을 보고 경악했다.
명동에서 그녀는 ‘스타벅스’나 ‘커피 빈’, ‘엔젤 인 어스’ 커피가 아닌 오래된 찻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겨우 찾은 찻집에 앉아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는 그 노랫말을 자세히 새겨들었다. 그리고는 정말 오랫동안 자신이 그 노래의 정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래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투명한 청춘의 떨림을 노래하고 있었다. 왜 그녀는 그 노래를 그렇게 우울하고 나른한 젊음의 배경 음악으로 생각했던 걸까? 아니 그 노래 말은 가볍고 경쾌했지만, 그 멜로디는 여전히 그녀에게는 나른하고 슬펐다. 거기다 하나 더한다면 아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젊음의 일회성에 관한 허무 정도였을까? 그 밝고 투명함이 그녀에게는 너무 밝고 가벼워서 오히려 나른한 상실의 어둠으로 끌어내렸던 것일까? 그 노래를 마저 들으며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꿈꾸는 듯 아련했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그해 여름은 유난히 천천히 갔다. 9월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병세는 생각보다 빨리 호전되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비행기 한 대가 세계 무역센터를 향해 부딪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그 거대한 건물의 꼭대기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건물 부분도 서서히 조금씩 거짓말처럼 주저앉았다. 그녀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 비행기 안에 남편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뉴저지의 집으로 돌아온 뒤 천천히 남편의 짐을 정리하다가. 그녀는 “죽음이란 셰이빙 크림의 반을 남기고 가는 것이다.”라고 쓴 ‘하루키’의 구절에 공감했다. 남편이 남기고 간 것들 중에는 반절의 셰이빙 크림 외에도 수많은 책들과 많지 않은 옷가지들과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 한 채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이 있었다. 그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집이 팔리면 나올 돈과 통장의 돈 모두를 남편의 딸 킴에게 상속하는 절차를 남편의 평생지기인 변호사에게 일임했다. 요양원의 사단법인에도 킴이 죽을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 그녀는 곁에서 킴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녀는 부부가 자주 가던, 이제는 폐허가 된 쌍둥이 빌딩을 떠올렸다. 다시는 꿈에서도 생각하기 싫은 장소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운 장소였다. 그들은 이층 책방에 가서 책을 고르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 밖에 내려다보이는 공동묘지를 조용히 내려다보곤 했다. 그녀는 묘지가 내려다보이는 그 책방의 창가에 앉아있는 걸 좋아했다. 가끔은 남편 없이도 혼자 가곤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남편은 동양 음식을 좋아했다. 중국 음식도 일본 음식도 한국 음식도 다 좋아했다. 그녀가 열심히 만든 것이면 무어라도 다 맛있게 먹었다. 김치찌개와 흰 쌀밥, 살짝 구운 스팸 한 쪽이면 그는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
유난히 근검절약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나무랄 데가 없는 남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새 옷이나 새 구두를 사지 않는다는 정도지, 아내가 돈 쓰는 걸 나무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밥을 먹은 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걸까? 그녀는 우는 일이 굉장한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많이 울어서 배가 고팠다. 뜨거운 밥에 김치찌개와 스팸 한 쪽을 구워서 그녀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목이 멘다는 뜻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제대로 실감했다. 또다시 혼자였다.
어쩌면 이런 일이 조금쯤 빨리 온 것뿐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또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잠시 조는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선뜻한 아침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남편 피셔 박사가 왜 그렇게 오래 자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녀는 모든 게 다 꿈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꿈이고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를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왼팔을 꼬집어보았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의수는 꿈이 아닌가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없는 왼팔은 어쩌면 그녀의 날개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미국에 처음 올 때 가지고 온 그녀의 마지막 그림을 벽장 속에서 꺼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가는 풍경이었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 길로 그녀는 차를 몰아 미술 재료를 파는 화방으로 갔다. 자폐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재료들을 사들인 적은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캔버스와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들과 갖가지 굵기의 붓들을 두근대는 마음으로 골랐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정말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