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2회
제리는 한 달에 두 번 자폐증세가 있는 조카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특이한 건 커다란 종이 위에 언제나 딱 한 사람만을, 그것도 귀퉁이에 개미처럼 조그맣게 그려 넣었다. 그 배경으로 아이가 칠한 하늘은 막막한 검은색이거나 음울한 회색이거나 잔뜩 성이 난 듯 붉은색이었다. 그녀는 문득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학원에 다니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제나 구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그리던 아이. 도화지 위에 하늘색은 절대 칠하지 않던 아이, 의수인 왼팔을 누가 눈치챌까 봐 화장실도 못 가던 아이. 그러던 어느 날, 미술학원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던 한 남자 아이가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너 팔 하나 없지? 근데 너 혹시 벙어리니?”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요즘 세상에서라면 그녀야말로 중증 자폐 어린이였다. 그녀의 자폐증은 일종의 결벽증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책에 글씨를 쓰면 그 글씨들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글씨가 남의 눈에 제대로 보일 때까지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썼다. 그러다가 공책은 찢어지기 일쑤였다. 공부를 하려면 방과 책상과 의자와 방의 공기 중에 먼지가 너무 많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불쌍한 노인이나 의족을 한 상이군인 용사를 만난 날은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세상의 불행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불행이 너무나 무거워서 어린 그녀는 잠이라는 침대에 고단한 날개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매일 학교에 가려면 광화문의 의수와 의족들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나야만했다. 그 가게 앞을 지나는 게 그녀에게는 매일의 고통이었다. 그 옆집은 생사탕을 파는 뱀 집이었다. 긴 유리관 안에 또아리를 튼 뱀들이 담겨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녀는 의수 가게와 뱀 사탕 가게를 지나쳤다.
1960년대 중반, 그 시절엔 길에서 전쟁의 후유증을 앓는 상이군인 용사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없는 왼팔에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제리’의 조카 ‘빌’을 보면서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다. 여덟 살인 빌은 온순하다가도 가끔 난폭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난폭성이었다. 성이 나면 귀를 피가 나도록 잡아 뜯고, 손톱에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빌을 대했다. 빌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진심으로 대했다. 그녀가 근무하는 병원 중 한 건물은 주로 자폐 어린이들이나 우울증 환자들을 위한 정신 병동이고, 다른 건물은 정신 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요양원이었다. 그녀는 그 두 곳을 왕래하며 수많은 종류의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은 그들에게 참 관대한 나라였다. 이를테면 정신 지체 장애인들에게 나라에서는 매달 기금이 나왔다. 그들이 모르는 새 통장 속에는 새록새록 돈이 쌓였다. 그 돈으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요양원의 월세를 내고 생활필수품을 사고 가끔은 영화도 보고 단체로 외출도 하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단체 영화 관람의 영화 종류를 결정하는 데 간호사들의 입김이 크다는 거였다. 그녀들이 공포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그들은 단체로 공포 영화를 보러 갔다. 무서운 영화를 보면서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이 우스꽝스러운 형식뿐인 행사의 절차에 관해 진절머리를 냈다. 커다란 두 눈에 순수한 열정을 머금은 잘 생긴 유대인 청년 제리는 요양소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어 주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제리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오자마자 한국 전쟁에 동원되었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던 그는 또 의연히 살아 돌아와 만신창이가 된 몸과 굳건한 정신으로 살아남아 아직도 가끔 홀로코스트에 관해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을 했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녀는 어릴 적부터 늘 전생에 자신이 ‘안네 프랑크’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그녀가 어릴 적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유일한 책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제리와 쉽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주말마다 만났다. 그는 가진 땅도 가진 돈도 없었지만.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가 부르고 양희은이 번안해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라는 노래를 연상케 하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은 늘 그렇게 노래 부르는 듯했다. 나는 너에게 땅을 사줄 수도 없고, 값비싼 반지를 사줄 수도 없지만, 일곱 송이 수선화를, 아침의 맑은 공기를,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고. 주말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 그들이 같은 음식을 맛있어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는 새우나 게 같은 갑각류와 날 생선을 먹지 않았다. 고기도 거의 먹지 않았고 점점 더 채식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솝 우화 속의 여우와 두루미의 식사를 닮은 그들의 식사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걸으며 온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즐거움 속에는 세상을 처음으로 발견한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때는 바야흐로 또 늦은 여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