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1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 이렇게 시작되는 산울림의 노래는 오래전 그녀의 대학 시절의 분위기를 추억하는 엑기스 같은 진술이었다.
그 노래는 80년대 특유의 절규도 저항도 큰 목소리도 아닌 예외적인, 평화롭고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 중심이 아닌 주변을 맴도는 나른한 수런거림, 젊음 특유의 불안 열정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지기 전의 모호한 욕망,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신선함,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둘은 호숫가에 앉았지." 그때 그녀에게 남자가 있었던가? 그 남자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어느 여름 밤, 정말 그 둘은 호숫가에 앉아서 아마 키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미적지근하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덜 삶아진 국수 같은, 그렇다고 별 떨림도 없는 키스. 그리고 3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군에 입대했다. 아니 아직 하지 않은 말이 하나 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길을 건너던 그녀는 어머니의 부주의로 어머니 손을 놓쳤다. 그러다 사고가 나서 왼쪽 팔 하나를 잃었다. 그녀의 왼팔은 그러니까 의수였다. 이십여 년을 의수를 끼고 살아온 그녀에게 그는 첫 키스를 한 뒤 바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왜 하필이면 팔 병신을 만나느냐고 그러더라." 물론 그의 성격상 악의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 존재 자체가 그날 밤 그녀에게는 커다란 악의였다. 그는 군대 가기 전날 밤 불쑥 찾아와 "너 오늘 밤 집에 들어가지 마." 했었다. 그 과장된 몸짓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어짐의 슬픔도 별로 없이 맨송맨송하게 그들은 아무 일도 없이 헤어졌다. 사실 그녀는 다른 누군가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그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다른 누군가와 강물을 바라보고 싶을 때,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셨다. 다른 누군가와 하고 싶던 키스를 그와 함께 나누었다.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그리면서, 늘 그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늘 다른 사랑을 꿈꾸며, 그와의 지루함을 참으며 벌을 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군에 입대한 뒤 소식을 끊은 뒤에도 그녀는 가끔 그를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도 자신을 정말 사랑한 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그녀는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길을 건너려고 파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그녀 곁에 그가 서 있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저 모르는 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가까운 스타벅스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많이 변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다음 날 그가 전화만 하지 않았다면, 거기까지는 산울림의 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처럼 그렇게 산뜻하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다음 날, 그녀가 근무하는 대학 캠퍼스로 찾아온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앉기가 무섭게 그는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야. 내가 마누라하고 이혼을 하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너도 혼자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니, 우리 그냥 결혼해서 같이 살자."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또 그 노래가 맴돌았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그는 그 옛날 군대 가기 전날처럼 또 엉뚱한 청혼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 순간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왜 그를 사랑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는 그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마치 군대 가기 전날과 똑같이.
그 후에도 그녀는 어디선가 그 노래를 들으면, 스무 살로 돌아가는 듯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몇 해의 여름이 지나간 걸까? 대학을 졸업한 뒤 그녀는 한국 주둔 미군 변호사랑 결혼을 해서 뉴저지에 정착한 언니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이던 그림을 포기하고 아트 테라피(미술 치료)로 전공을 바꾸었다. 매사에 수동적인 자기 자신을 치료하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어쨌든 아트 테라피는 그녀의 적성에 맞았다. 학교를 마치고 그녀는 뉴저지 근교의 정신 병원에 취직을 했다. 그 병원에는 주로 우울증 어린이들과 병원에 거주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들이 입원해 있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림으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하며 그녀는 보람을 느꼈다. 제리를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그녀가 병원에 취직을 한 그해 여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