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아주 오랜만에 어젯밤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우리가 살던 옛집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두르며 그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는 섭섭한 듯 “왜 좀 더 있다 가지.” 하신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왜 저기 계실까 하는 나의 의구심은 꿈속에서도 계속되었다. 꿈속의 공기는 왠지 선뜻했다.
죽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은지를 모르고 있는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섭섭한 빛이 역력한 아버지께 “자주 뵈러 올게요.” 하며 집을 나서는데, 생시처럼 갑자기 목이 메었다. 꿈속에서 나는 계속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살아계시는데, 유골은 어디 있을까? 아버지는 너무 외로워 보인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그렇게 멀리 두어야만 하는가? 서양의 시골 공동묘지처럼 집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아니 예쁜 항아리에 담아 집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에 두면 안 될까?
나는 희망한다. 언젠가 먼 훗날에 누군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의 유골을 예쁜 항아리에 담아 머리맡에 두거나, 양평이나 청평 쯤 시원한 북한강 강물에 띄어 보내주기를.
사실 이런 생각들은 현실 속에서도 내가 가끔 생각하는 내용이다. 아마도 배우 최진실의 유골함 도난 사건에 관해 너무 많은 방송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꾼 모양이다.
언젠가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과 낮>이 생각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자연스런 표정들을 소재로 삶이라는 보자기를 직조한다는 점에서, 나는 내 그림을 보는듯한 친근감을 느꼈다. 우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깬 뒤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거나 아쉬운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우리들의 삶도 크게 보면 이 짧은 개꿈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암시하면서 영화 <밤과 낮>은 일장춘몽의 막을 내린다.
그러고 보니 영화 중 모든 장면이 꿈속 같다, 생각처럼 우리들의 꿈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엉뚱한 곳에 놓인 변형된 일상이 바로 꿈의 공간이다. 힘을 빼고 만들어서인지 이 영화는 지루한듯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가끔 졸면서 봐도 제 맛이다. 너무 힘을 주면 오래 못한다. 그게 무엇이든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도 가끔 딴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의 시간들과 만나는 틈새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긴 나도 그날 오후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잠시 조는 사이 개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 나는 사철탕 집에 끌려가는 백구 두 마리를 돈을 주고 사서 구사일생으로 살려주었다. 여기까지는 꿈이 아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꿈속에서 어느 험상궂은 미국인이 개 두 마리를 끌어가려고 목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게 아닌가? 꿈속에서 다가가 연유를 물으니 그는 개가 아니라 그 목줄이 자기 거라고 우기는 거였다. 내가 동물병원에서 이만 원을 주고 산 고급 개 목줄을 말이다. 꿈속에서 나는 그 미국인과 영어로 마구 욕을 하며 싸웠다. 그 짧은 꿈을 꾼 뒤 보러 간 영화 <밤과 낮>은 종류는 아주 다르지만 꿈의 연속이었고, 우리들 삶이 곧 그 개꿈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방학이라 집에 다니러 온 외국 유학생들과 함께 대마초를 피다가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된 무명 화가는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연인 관계를 맺게 되는 여자와 파리의 풍경들이 현실인지 꿈인지,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현실은 곁에 누워있는 진짜 아내다. 꿈속에서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이유 없는 여자가 새로운 아내가 되어 출현한다. 그는 꿈속에서 그녀에게 왜 내 옆에 붙어 있는 거냐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넌덜머리를 낸다. 왜 우리는 이렇게 엉뚱한 꿈을 꾸는 것일까?
나는 오래전에 꾼 아직도 생생한 꿈들을 기억한다. 집 앞의 골목길을 돌아나가 갑자기 거대한 폭포가 나타나는 풍경이라든지,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내가 신나게 차를 몰고 달리는 꿈들이 어제 꾼 듯 생생하다. 주인공이 잠에서 깬 뒤 바라보는 천정 위로 끝없는 뭉게구름이 흘러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생활의 발견인 동시에 백일몽의 서사시다.
우리들의 꿈같은 밤과 낮이다. 영화를 보면서 2008년의 어느 봄날이 느린 꿈처럼 흘러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매미 소리가 슬슬 선선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2009년의 늦여름이다.
지난 시간들은 영화 속이나 현실이나 꿈이나 다 꿈이 아닌가? 때로 정말 그들의 경계가 구별이 되지 않기도 한다. 정말 우리들의 삶이 내 좋은 대로 꾸는 꿈이라면 좋겠다.
꿈속에서 꿈을 이루고, 꼭 맘에 드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기분 좋은 일만 일어나는 그런 꿈- 그래도 후회하는 장면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늘 고쳐서 다시 꾸고 싶을 것이다.
문득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이 아주 근사한 영화 제목 하나가 떠오른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