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의 사랑
그는 노래방에 갈 때 마다 남들이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르는 사이, 오래 된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을 불렀다. "나 혼자만이 당신을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당신을 갖고 싶소."
그 노랫말이 너무 좋아 친구들의 빈축을 사면서도 그는 늘 그 노래를 빠짐없이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는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 노래를 부르면, 그 아무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아 감정 이입이 전혀 되지 않았고, 기껏 떠오른 얼굴이란 기르던 개의 얼굴이었다. 이후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오래된 노래 '향수'를 불렀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노래가 그 지점에 도달할 때 마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특히 '아무렇지도 않고', 그 구절이 그를 눈물 나게 했다. 그렇다고 이미 남남처럼 지낸 지 오랜 아내가 새삼 생각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발기하지 않게 된 남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된다는 말을 들은 생각이 났다. 연쇄 살인범이 되거나. 정말 여자를 인간으로 사랑하게 되는 따뜻한 휴머니스트가 되거나. 하긴 사람을 꼭 죽여야만 살인인가?
단 한 번이라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 그들 모두 살인자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요즘 그는 서서히 그런 식의 결벽증이 생겼다. 오십 해가 넘는 동안 몇 명이나 되는 여자를 사랑했을까? 그는 새삼스럽게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예전 같으면 베르테르에게는 롯데가, 심순애에게는 이수일이, 성춘향에게는 이도령이 단 하나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개의 이도령이 몇 개의 롯데가 우리 앞에 남아있는지 알게 무언가?
문득 지나간 사랑은 몇이든 전부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머리, 다리, 맹장. 심장, 팔, 손가락, 손톱 어느 것이 가장 진짜였냐고, 어느 부분이 제일 맛있더냐고 묻는다면, 그 때 그 순간만큼은 다 똑같이 맛있고 새콤하고 달콤했었노라고, 그런 답변을 하기는 싫었다. 이사를 자주 다니던 집들이 다 똑같지 않듯이, 분명 추억의 농도와 여운은 다 다를 것이었다. 그저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어쩌면 뭉뚱그려 하나의 하느님이나 부처님처럼 커다란 정신,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좁은 문, 끝이 나지 않는 계단. 끝없이 올라가 문을 열면 절벽 아래 펼쳐지는 바다. 아니 시시한 군것질, 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을 때 빵 가게 앞을 지나치는 배고픈 사람의 결코 잠재울 수 없는 허기, 결코 하나 될 수 없을 하나 됨을 향한 열망, 착각, 기쁨, 절망, 또 다시 움틈… 별 새로울 것 없는 나날의 삶, 기적 같은 평화, 그리고 죽음… 그 사이 틈새에 끼어드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달콤새콤한, 그러나 때로 이빨이 썩기도 하는 간식 같은 사랑…
그런 끝없는 생각의 거미줄 사이로 누군가 물총을 쏘듯, 전화벨이 울렸다. "너 어제 잘 들어갔어?" 어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나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던 여자 동창생이었다. 맞다. 그녀가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불렀었다. 요즘은 아무리 술에 취해 비틀대며 서로의 등을 보이고 헤어져도, 다음날 아무도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는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그 자신도 그런 전화를 해본지 무척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안부 전화쯤은 당연히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다음 날 전날 밤의 안부를 묻는 게 한물 간 세대의 사라져가는 풍습인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긴 사설이 중간 중간 끼어들면서, 그는 오랜만에 만난 여자 동창생의 전화를 받았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떻고', 밝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어대는 그녀 목소리가 오랫동안 들어왔던 목소리처럼 낯익었다. 그리 예쁘지도 않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어릴 적에 그냥 그림을 잘 그렸었다는 기억으로 남는 그녀의 전화 한통에 갑자기 그의 마음이 환해졌다. 다음 주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인사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은 그는 갑자기 환해지는 기분이 날씨 탓이라고 자신에게 둘러댔다.
며칠 동안 비가 온 뒤, 정말 오랜만에 날씨가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