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 위험한 곳에 있었다니, 그럼에도 살아있다니,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합니다.
이곳의 삶 속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자살 폭탄 테러 소식에는 웬만해서는 놀라지도 않는 가슴이지만, 당신이 겪었을 공포가 가슴에 전해져와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요즘 가끔 나도 라스베이거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이곳에서 환자들과 씨름하다 보면 라스베이거스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죠. 노동을 잊어버린 놀이의 세계, 가끔은 그런 곳이 사무치게 그리워져요. 그러다 마침 뉴스를 듣고 묘한 기분에 빠져있는데, 당신의 편지를 받았어요. 살아있다니, 살아있으면 되는 거죠. 아주 가끔 어쩌면 꿈속에서 그 범인처럼 세상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그리고는 어디론가 하염없이 도망을 가죠. 이유도 없이 총기 난사 사건을 벌인 후 자신의 머리에 한 방 쏴버리는 행위는 우리 같은 사람은 꿈속에 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죠. 게다가 전과 기록도 약물 중독기록도 없는 평범한 은퇴한 회계사가 벌인 총기 난사 사건이라니, 매일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탄생하나 봅니다. 범인 스티븐 패덕은 사흘 전에 호텔 32층에 미리 투숙한 뒤 길 건너편 야외 콘서트장에서 공연을 보고 있던 이만 이천 명 관객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하더군요. 그 안에 당신이 있었다는 건 내가 꾼 모든 악몽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몽입니다. 32층에서 군중을 내려다보며 무차별 난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산 위에서 평지를 내려다보며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크로아티아계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기난사를 벌였던 보스니아 내전이 생각나네요. 전쟁이 끝난 뒤 폐허가 된 사라예보에서도 한 1년 근무했었답니다. 새파랗게 젊을 때였죠. 꿈속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다 쏴 죽여 버리는 꿈은 사실 세상의 나쁜 사람들을 향한 분노 같은 것이었어요. 악인들만 모아놓고 총기난사를 해대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하지만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마치 사람을 물어 죽이는 개를 미리 알아보는 것처럼이나 악인을 구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세상을 놀라게 한 끔찍한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의 사이코패스적 성향도 과거의 어두운 순간들에 그 끈을 묶어두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주인을 물어 죽인 평소에는 순한 애완견처럼 그 마음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죠. 언젠가 매스컴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자신의 끔찍한 범죄를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 주인을 물어 죽인 애완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살인범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의 끔찍한 범죄에 관한 매스컴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본질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죠.
육십이 넘도록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위험한 인물로 보이지 않고 살아오다가 한꺼번에 터진 그의 광기는 과연 그만의 것일까? 어쩌면 선도 악도 전염되는 것인가 봐요. 단지 악의 전염이 그 속도가 더 빠른 건지도. 종교적인 이유도 아니고 전쟁의 목적도 아닌 이유 없는 살인이라는 게, 게다가 살만큼 살아온 사람의 행동이라는 게 가장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었을까요? 우리는 아주 선함도 갖고 태어나지만, 반대로 엄청난 살의 역시 타고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의사는 누군가를 살리는 직업이지만, 때로 실수로 사람들을 죽이는 일도 흔한 일이죠. 엉뚱하게도 인턴 시절 시체해부를 했던 어느 날이 생각나요.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시신 한 구를 해부할 때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기분까지 들었답니다. 각자 하루는 팔, 하루는 다리, 이런 식으로 가지고와서 혼자 해부를 하기도 했어요. 그것도 업무를 마친 밤에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서 말이죠. 논문을 쓰기위해서 라고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솔직히 머리끝이 비죽비죽 서곤 했어요. 시간은 보통 때는 활을 떠난 화살처럼 눈 깜짝할 새 흘러가지만 아주 가끔은 1분씩 또박또박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죠. 바로 그때가 그렇게 또박또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중의 하나였어요. 내가 해부를 맡았던 시체의 손에 커다란 보석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그 반지를 아무리 빼려 해도 쉽게 빠지지가 않았어요. 겨우 반지를 빼서는 동료들에게 술 한 잔 거나하게 사겠다고 뻥을 쳤어요. 보석이 꽤 커서 값이 꽤 나갈 듯 보였거든요. 인턴들 세 명이서 보석반지를 들고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했는데 그건 가짜 보석반지였어요.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그는 그 커다란 가짜반지를 낀 채로 죽은 걸까요? 그 반지를 버린다하면서 어딘가 두고는 그냥 잊어버렸던가 봐요. 그 반지가 며칠 전 꿈속에 내 손에 끼워져 있었어요. 그게 내가 언젠가 해부했던 시신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라는 생각은 꿈에서는 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게 가짜였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저 참 큼직한 값나가는 반지라는 생각이 스쳐갈 뿐이었지요. 그 반지를 작게 줄여서 나는 누군가를 주기 위해 파티장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아마 내 결혼식인 것도 같고 장례식인 것도 같았어요. 어쨌든 내가 파티장에 도착하기 바로 전 멀리 차 속에서 바라본 풍경은 나의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파티장에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사망하는 끔찍한 꿈이었어요.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나의 신부를 향해 울부짖으며 아수라장이 된 파티장으로 뛰어가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신부를 살려 줄 테니 반지를 돌려달라고 했어요. 엉겁결에 상자째로 반지를 그에게 내밀었는데, 줄여서 예쁘게 세팅한 그 반지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손만 보이는 덩치 큰 남자의 손가락에 마치 제 것처럼 딱 맞아 들어갔어요. 깨서 생각하니 이 꿈이 길몽인지 흉몽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사이에 라스베이거스 참사 뉴스를 들었고, 곧 당신의 편지를 받았어요.
반지 주인이 나의 신부를 살려준 걸까요? 그렇게 엉뚱한 생각들 사이로 또 오후가 지나가고 있네요. 누군가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라고 썼던 기억이 나요. 그 말은 아마도 우리가 속절없이 흘러 보낸 청춘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당신이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나 봅니다. 근사한 반지를 사 들고 청혼하러 가는 파티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부가 당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