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오랜만에 가게 된 라스베이거스는 참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자동차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근처의 모하비 사막을 아무리 달려도 기억 속의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그곳엔 없지요. 그래도 왠지 사막 한가운데 있는 허름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영화 속에서처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드네요. 영화 속 뚱뚱한 여주인공이 마술을 걸어 순간이동 하는 것처럼 금세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어요. 모든 소리가 다 들리는 언니에게 라스베이거스는 견디기 힘든 도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세상의 모든 소리를 막아주는 다양한 귀마개 덕분에 언니는 견딜 만하다고 말했어요. 단지 힘든 건 사람과의 소통이라고. 밤이 되면 언니를 집안의 적막 속에 두고 매일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구경하느라 당분간 참 즐거웠지요. 라스베이거스는 결혼도 이혼도 그 절차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도시여서,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과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미국 각 도시에서 몰려온대요. 사막에 파이프로 물을 끌어들여 세운 아름다운 호텔공화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도시, 나는 늘 라스베이거스를 그리워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카지노 불빛만 보아도 현기증이 나는 내가 그 화려한 라스베이거스를 그렇게도 그리워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요. 낯선 혹성에 떨어진 것 같은 이국적인 느낌,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수성에서 금성을 넘나들 듯 온종일 호텔 구경을 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도 좋았어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공도시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을 돌아보며 나는 문득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렸어요. 화려한 스트립 쪽에 벨라지오, 베네치안, 코스모폴리탄, 시저스팰리스, 윈 같은 고품격 호텔들이 몰려있고, 뉴욕과 파리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뉴욕뉴욕, 파리스호텔 등이 연달아 이어져 있어요. 도로의 양쪽 끝으로 갈수록 오래되고 시설이 낙후된 호텔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처음 생겼을 때는 물론 다 호화로운 호텔이었을 테지만요.
당신도 가보았겠지요. 같은 체인의 호텔들이 있기는 하지만, 마카오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또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설국열차』를 아시나요? 기상이변으로 백색 사막이 되어버린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이 설국열차에 타고 철로 위를 순환한다는 내용의 영화말예요. 열차의 호화로운 앞칸에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타고 있고, 뒤로 갈수록 빈민들이 타고 있어, 그 안에서 생존 경쟁이 숨 막히게 펼쳐진다는 이야기가 이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풍경에 오버랩되다니…. 엉뚱하지만 제게는 딱 그렇게 보였어요. 호화 객실인 앞칸에는 푸른 채소와 맛난 고기들이 제공되고, 꼬리칸에서는 굶주리고 오물에 치여서 서로를 죽이거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곳. 어쩌면 설국열차는 우리들 삶의 현장인지도 모르죠. 숨 가쁘게 움직이는 영상들과 화려한 광고판들로 눈이 빙빙 돌아가는 고급호텔 구경이 다 끝나면 슬슬 오래된 호텔들로 발을 옮겨요. 마치 연극무대처럼 낡으면 낡은 대로 골동품처럼 낡아가는 호텔들 중에서 인상적인 호텔 중 하나가 써커스 써커스 호텔이어요. 들어서자마자 꿈속처럼 어수선한 풍경들이 연출되면서, 먼 나라 동화 속에나 나올듯한 놀이기구 ─ 치졸하고 난삽하여 이해할 수 없는 ─ 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그곳에는 유독 어린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더 꿈속처럼 느껴지더군요. 카지노와 아이들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어요. 타임머신을 탄 듯 오래된 카지노 기계들이 낯선 풍경을 연출하는 곳, 그곳에 들어서니 엘비스 프레슬리의 흑백 사진이 새겨진 낡은 카지노 기계에서 엘비스 동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어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기계가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언니의 병은 카지노 기계에서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서 시작된 건 아닌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덜거덕거리는 소리는 수많은 다른 소리들로 증폭되다가 드디어는 총성으로 들려왔어요. 동전 소리가 총소리로 들리다니, 언니가 그랬거든요. 귀를 꼭 막으면 어디선가 먼 총성이 들려온다고. 무슨 애니메이션 영화 속의, 이런 노랫말이 떠올랐어요.
“세상엔 오늘도 나만의 총성이 울리네. 부질없는 모래바람이 불어가네.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새로 태어나네. 무언가는 사라지고 무언가는 새로 생겨나네. 끝없이.”
끝없이 떨어지는 동전 소리를 들으며 엘비스 프레슬리 사진이 새겨진 낡은 카지노 기계를 들여다보는데, 뒤쪽에서 박수 소리가 났어요. 소리가 들리는 데로 가보니 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마술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설국열차』의 꼬리칸에 설치된 것 같은 낡은 무대 위에 꼬깃꼬깃 때가 묻은 하얀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옛날식 마술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삼십 년 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마술을 보는 일은 향수를 자극했지만, 눈물이 나도록 슬픈 기분이 들었어요. 남자는 연미복 안쪽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시키고는 마임이 섞인 약간의 코믹한 제스처를 보여줬고, 그러자 그의 품속에서 비둘기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시 구절이 떠올랐는데 출처는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당신의 장미와 캔디는 거짓이었다는 걸, 그래도 행복했어요.” 그 소리는 “당신의 마술이 거짓이었다 해도 행복했어요.” 그런 말로도 들렸어요. 써커스 써커스 호텔을 나와 이집트 피라미드를 재현해놓은 룩소르 호텔을 구경하다가 긴 통로를 통해 이어진 만달레이 베이 호텔로 넘어갔어요. 예전에는 초호화 호텔이었을 그곳 상가의 골동가게들을 둘러보니 과거 속을 여행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다음날 밤 그 호텔 야외 공연장에서 하는 컨트리뮤직 페스티발 표를 한 장 사고는, 오래전에 가본 기억을 더듬어 모노레일을 타고 라스베이거스의 다운타운을 찾아갔어요. 라스베이거스의 오리지널 다운타운인 프리몬트 밤거리에는 450미터에 걸친 70년대식 라이트 쇼가 아직도 한참 진행 중이었죠. 거리 한가운데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을 맞으며 한동안 서 있었어요. 스트립의 현대적인 영상들과 달리 빈티지 올드 스타일의, 하지만 나름 화려한 카지노 전광 불빛은 칠팔십 년대로 돌아가듯 정겨웠지만 쓸쓸했어요. 마치 오래된 과거의 한 장면 속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아시죠? 세계에서 가장 큰 슬롯머신이라는 마티니 글라스, 핑크 플라밍고, 동전 비디오 릴 등 예전에 들은 이름들을 떠올리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낯익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는 거였어요. 돌아보니 카지노 딜러인 헤어진 남편의 연인이었어요. 그 옆에는 남편대신 아주 잘생긴 나이든 미국남자가 서있더군요. 그들은 내게 다정한 눈길을 다시 한 번 주고는 총총 사라졌어요. 무슨 생각으로 나를 아는 척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더군요. 만일 나라면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텐데 말이죠. 하긴 그게 뭐가 다르겠어요?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운타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세계 최대의 금괴가 있다는 골든 너겟 호텔의 중국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시키려는데 나이든 중국인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와서는 한국분이냐고 묻더군요. 그렇다 하니 여자친구가 한국여자인데, 곧 오겠다며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어요. 모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중국식 볶음밥과 만두수프를 먹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에 눈물처럼 흘러들어오는데, 귀속에는 여전히 쉴 새 없이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귀마개를 한 언니의 귀에 들리는 총소리가 섞여 참을 수 없는 소리로 증폭되어갔어요. 어쩌면 언니의 소리 병이 전염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 문득 헤어진 남편을 생각했어요. 어디서 뭐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기억 속의 흐릿한 그 얼굴은 곧 당신의 얼굴로 옮겨갔어요. 낯설면서 낯익은 얼굴, 그러나 몹시 가까운 느낌의 단 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잠시 슬픔이 멎는 것도 같았어요. 언젠가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이 많아 도우미를 몇 달 동안 둔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녀는 도벽이 몹시 심했어요. 매일 무언가 없어졌고, 나는 모든 걸 감추기 시작했죠. 지갑도 향수병도 질 좋은 화장품도 소중한 모든 것들을요. 하긴 휴지도 음식도 세탁세제도 시시한 일상용품들도 안 가져가는 게 없었죠. 모든 소중한 것들을 감추기 시작한 나는 이제 그것들을 찾느라 힘들어졌어요. 어떤 때는 너무 깊숙이 감춰놓아서 찾을 수가 없곤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나의 적은 바로 나였던 거다.” 하는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났어요.
너무 깊숙이 감춘 바람에 내 소중한 것들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 못 말리는 감추는 버릇은 도우미가 가고 난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그러다 문득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깊숙한 곳에 감춰놓고, 어디에 있는지 매일 찾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접고 일어나 언니에게로 돌아가니 스웨덴인 형부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고, 언니는 여전히 귀마개를 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있었어요. 다음날 만달레이 베이 호텔에서 개최되는 콘서트를 같이 가고 싶었지만, 언니는 모든 소리를 참을 수 없는 지경이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말았죠. 다음날 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만달레이 베이 호텔 야외 콘서트장으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