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는 밤이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배경음악 「콜링 유」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는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어요. 당신을 찾아다니는 꿈속에서 보일 듯 보일 듯 당신은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쓴 ‘평생 가는 은은한 열정’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시칠리아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다가와서 저 안에 당신이 있다고 먼 곳을 가리켰는데, 가보니 그곳은 바로 당신이 예기한 카타콤베Catacombe, 시체박물관이었어요. 얼마나 슬프던지 막 들어가려는데 이미 그곳은 입장 시간이 끝났다는군요. 그러다 잠이 깼는데,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어요. 내가 보지 않은 죽음은 죽음이 아니니까요. 문득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전화 한 통이면 들을 수 있을 텐데, 이 망설이는 마음은 무엇인지요. 며칠 전에는 또 카불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지진이 난 것처럼 온 도시가 강하게 흔들렸어요. 마침 약속이 있어 카불 시내에 갔던 나는 폭발 현장을 멀리서 목격하게 되었죠. 피 흘리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날만큼은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천직인지라 달려가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치료했답니다. 늘 그렇듯 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어요.
얼마 전 이곳에 한국인 간호사 한 분이 새로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전율했어요. 나이는 당신보다 젊었지만, 또렷한 말투와 낮은 목소리는 뭔가 타인에게 평화스런 느낌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어요. 당신의 목소리가 그럴 것 같은, 그런 목소리. 그녀와 짧은 몇 마디를 나누며 나는 당신이 이곳에 있는 착각을 잠깐 했답니다. 그녀에게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아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더군요. 내용도 별로 없지만 그냥 그 평화스런 분위기가 좋았다나요. 뚱뚱한 여주인공이 마술을 하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더군요. 어제는 영국에서 또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이제 세상은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한국인 간호사에게 한국은 위험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안전하다 하더군요. 사실 우리 모두는 그 어디서든 살아있는 그 날까지 안전한지도 모르겠어요. 서울에 내 여자 친구가 살고 있다 하니 뛸 듯이 반가워하며 이름이 뭐냐고 물어서 이름을 말해주니 놀랍게도 그녀는 당신이 혹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냐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병원에 근무할 때 당신이 환자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요. 자기도 따라서 그림을 그리곤 했대요.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죠. 시리아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Palmyra로 가는 사막 한가운데 있던 진짜 ‘바그다드 카페’에서 당신 그림을 보았던 날의 충격이 되살아나네요. 혹시 당신이 내 눈앞의 세상에 마술을 걸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눈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바꾸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속임수, 그게 마술이라면 당신의 마술은 언제나 내게 즐거움 이상의 화두를 던집니다.
바그다드 카페에 걸려있던 그림은 누가 갖다 놓은 것일까? 당신을 안다는 한국인 간호사는 어느 날 환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당신이 이제 그림은 각자 그리고 마술을 해보자던 말에 깜짝 놀랐다 하더군요. 문득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떠올랐대요. 날씬한 당신을 보면서 왜 영화 속 뚱뚱한 여주인공이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대요.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 당신이 마술을 하는 모습을 본다 하네요. 오래전에 본 80년대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바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는 마술을 예언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틈만 나면 나는 그녀와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요. 파리에서 런던에서 카불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도, 알라는 위대하다며 자폭하는 외로운 늑대를 텔레비전에서 봐도 새삼 놀랄 일이 아닌 듯 우리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어요. 어제 그녀는 그때 그 시절 당신을 사랑했던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당신 이후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는 IS에 가담한다며 터키로 떠났대요. 그를 찾으러 터키 곳곳을 헤매다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왔다 해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이른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랑은 지는 게임」이라 말했어요. 그래서 나도 말해주었죠. 사춘기 시절 내가 좋아하던 노래는 폴 매카트니가 부른 「Junk」라는 노래라고. 아주 옛날에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떠나간 애인 이야기를 하면서 ‘따라라라라라 라라라’하는 노래 「정크」를 들려주었다고. 그 시절 나는 그녀와 말로만 들은 그녀의 떠나간 애인과 그가 좋아했다는 노래 정크를 다 같이 사랑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나중에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었다고. 세월이 또 많이 흘러 나는 내 아내도 그 노래를 좋아했다던 아내의 옛 애인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정크」라는 노래만 내 안에 남았다고. 간호사 아가씨는 내 복잡한 심경을 안다는 듯이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부른 노래를 낮은 목소리로 불러줬어요. “사랑은 지는 게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억” “내 남자가 만일 잘못된 전쟁을 지지한다면 나도 그 전쟁을 지지할 거야.”
우리는 서로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아프가니스탄산 와인 두 병을 깨끗이 비웠답니다. 그녀가 언제 간지도 모르게 나는 당신 꿈을 꾸었어요. 내 방에 걸려있는 당신 그림 속 소녀가 당신이 되어 내 곁에 앉아있는 꿈을. 결코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