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박경아’ 그렇게 쓰다가는 지우고, ‘사랑하는 당신’ 그렇게 쓰다가는 지우고, 그 어떤 관계의 이름 속에도 들어가지 않는, 우주 밖의 친구를 향해 손을 내미는 외계인의 고독으로 읽힐까 봐 전전긍긍하던 새벽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그 어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보다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 거라고 언젠가 당신이 말해주었죠.
매일 환자들을 돌보며 나는 이곳의 황량함에 슬슬 지쳐가고 있습니다. 눈사태로 백 명 이상의 주민들이 세상을 떠난 고립된 산간마을에 구호물자를 옮기던 적십자 차량이 IS의 공격을 받아 여섯 명 전원 사망했답니다. 그중에는 그곳 지역을 잘 알아 차량과 동행했던 제 동료도 끼어있었어요.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IS의 공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사람이 899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이곳 바그람은 겉보기엔 안전한 곳이어요. 미국 공군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니 그럴만하지요. 유서 깊은 기원전 페르시아제국의 고대 도시이며, 실크로드 상의 요지로 많은 고대 유적이 남아있는 바그람은 공군기지 따위로 쓰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만 들어도 내 마음속은 어디나 전쟁터네요. 모니터로 당신의 글을 읽는 순간은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읽는 것처럼 행복했답니다. 가끔은 “이제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어요. 당신은 너무 멀리 있네요.” 이런 글이 날아올까 조마조마하기도 하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곳이 전쟁터가 되었지만, 하긴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요? 당신이 마카오에 다녀왔다니 새삼 라스베이거스가 생각나네요. 마카오의 내면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낸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언젠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신비롭고 낯선 혹성 같은 호텔들의 분위기에 넋이 빠져 카지노엔 관심도 없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당신과 함께 그곳에 가고 싶네요. 현실적인 세상 걱정은 잠시 물품 보관소에 맡겨두고 사치와 낭비와 망각의 풍경들이 펼쳐지는 곳으로. 아픔과 상처와 광기로 충전된 전쟁터와는 가장 먼 곳이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디즈니랜드에도 가고 싶어요. 미국에 살 때는 그저 상업적인 장소로 여겨졌던 디즈니랜드가 왜 그리 그리운지 모르겠네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당신의 손을 잡고 색색깔의 풍선을 한 손 가득 쥐고, 입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콘을 먹으며 천국을 닮은 디즈니랜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봐요. 문득 사람들로 들끓는 그곳에 자살폭탄이 터지는 영상이 눈에 보여요. 이게 요즘 내게 생긴 증후군이랍니다.
텔레비전을 켜니 당신이 살고 있는 서울 풍경이 나오더군요. 오늘은 꽃샘추위라는 말을 한국인 동료에게서 배웠어요. 파르르 추운 듯 느껴지는 박경아 당신, 당신이 살고 있는 서울은 멀리서 보기에 쩍하면 폭탄 테러 소동이 나는 이곳이나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네요. 왠지 서걱거리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당신의 주변을 감싸고도는 황량한 풍경이 그려졌어요. 아니 꽃이 피고 있다고요? 세상 어디서나 꽃이 피는 계절, 꽃은 우리 마음과 아무 상관 없이, 아니 꼭 우리 마음처럼 흐드러지게 피고 있네요. 저 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꽃은 늘 살라고 내일도 살아남으라고 꽃이 져도 죽지 말라고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아요. 텔레비전에서 난파선 세월호의 모습이 흐린 영상으로 지나가고, 그 모습이 마치 내 모습처럼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았어요. 순간 빗줄기처럼 무거운 내 영혼을 때리며 누군가 이렇게 묻는 거였어요. “이렇게 낯설고 먼 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실제로 폭탄이 터지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매 순간 터지는 폭탄 소리,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자살 폭탄 조끼를 열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마는 어린 소녀의 영상이 자주 꿈속에 나타나요. 어젯밤 꿈에는 난파선 세월호에 당신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온 배 안을 뒤지고 다니는 악몽을 꾸었어요. 멀리서 허둥대는 당신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데 다가가 보니 자살 폭탄 조끼였어요. 이렇게 무서운 꿈을 꾸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밝아지는 건 왜일까?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오늘 행복하지 않다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어디선가 들은 말 같기도 한데 혹시 당신이 들려준 말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주 오래전 딱 한번 본 당신의 기억과 페이스북 속의 사진들과 내가 갖고 있는 당신의 그림과, 그것만으로도 사랑하기엔 부족함이 없는데, 아니 당신밖엔 없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신이 답하겠지요. 사랑의 환영이라고. 사랑은 가까이서 만지고 끌어안고 냄새 맡는 거라고. 아- 나는 당신의 ‘위대한 개츠비’가 되어주고 싶어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당신만을 사랑하는 위대한 개츠비, 하지만 위대한 감정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는 걸, 아프게 깨닫는 봄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