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아, 당신의 모든 것이 궁금해요. 우리가 똑같이 불행했던 시간들마저 그리운, 박경아 당신 오늘도 행복했나요? 우리가 처음 만난, 아쉽게 스쳐간 그 날들에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바그다드카페의 주제가 「calling you」가 휴일 오후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어요.
갑자기 듣고 싶은 당신의 목소리, 아주 짧은 영어로 그림 설명을 해주던 그 어눌한 영어발음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아주 짧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기억들 중에 당신의 목소리가 저장되어있네요. 그건 마치 무더운 날에 잠시 뿌려준 비가 그친 뒤의 무지개 같은, 하지만 아무 데서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던 아련한 향기 같은, 갑자기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싶던 내 마음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요. 그 시절만 해도 세상에는 공중전화들이 널려 있었죠. 25센트짜리 동전을 넣고 아무 번호나 돌리면 당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던 그런 봄날들,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만난 이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까 이해하리라 믿어요. 그런 알 수 없는 마음들을. 마치 박경아 당신을 스쳐 간 이후,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애틋한 마음을 느꼈던 여자들은 다 박경아 당신이었으니까. 당신이 그린 그림을 내가 머무는 방 어디에나 걸어놓은 뒤 당신은 내게 결코 타인이 될 수 없었어요. 그 뒤로도 마치 패키지 여행 같은 빤한 연애를 몇 번 하기도 했지만, 그런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연애가 끝날 때마다 당신은 내 마음속 방 어디선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어요. 언젠가 정신과의사인 친구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어요. 한 번 밖에 본 적 없는 낯선 동양여자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면 병이 아닌지. 친구는 말하더군요.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게 누구든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게 여자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림이든, 잊히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게 바로 살아있다는 거라고. 페이스북에서 박경아 당신을 발견했을 때, 난 살아있다는 흥분에 전율했어요. 조금 전 라디오에서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가 「calling you」를 듣는 순간 내가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기지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네요. 박경아, 당신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바그다드 카페에 앉아있는 상상, 이 상상이 실제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오늘은 안녕.
─ 당신을 꿈꾸는 앨런, 바그람에서
안녕하세요? 앨런이라 불리는 사람, 제 영어발음이 매력 있었다고요?
참 나, 그 시절 저는 영어는커녕 모국어인 한국어도 더듬거리곤 했어요. 어릴 적부터 말을 더듬던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할 수 있게 된 건 기적이어요. 한 이백 년 거뜬히 살아낼 수 있다면 네 나라말쯤 해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니 진짜 영원한 사랑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에게 실망을 주었던 스쳐 간 사랑들도 알고 보면 다 애틋한 우리 삶의 얼룩들이지요. 제 인생에 가장 또렷한 독서의 기억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였어요.
말을 더듬는 정신지체장애인의 웅얼거림으로 표현되는 삶의 고통과 분노와 그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들이 얼마나 내 마음 같았는지, 세상의 소음들은 각자의 소리로 분류되어 예민하게 제 귀에 꽂혔어요. 그 고독한 소리들을 그림으로 그려낸 게 제 작품일지도. 제 그림이 당신께 위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헛산 건 아닌 것 같네요.
하긴 누군들 헛살겠어요? 그 누구의 삶도 헛되지 않기를. 제가 좋아하는 시 한 구절 당신께 들려 드릴게요.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ㅡ 피천득 ‘오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