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다 답장 씁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당신이 알아본 박경아입니다. 제가 당신의 얼굴을 기억한다면 믿으실까요? 제 삶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어느 봄날, 당신이 갤러리 안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자살을 꿈꾸던 날들, 당신이 내 그림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그 뒤로도 한동안 제 기억 속에 남았었지요. 당신은 제게 그림을 하나 사고 싶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제가 없는 사이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던 작은 그림을 사 가셨더군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 팔아 본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는지요. 당신이 그림을 샀다는 사실을 안 뒤 제게는 작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누군가 나와 소통하고 있다는 외롭지 않은 느낌, 따뜻한 피가 차가운 내 몸속으로 수혈되는 그런 순간의 기분이랄까요. 당신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 그 외롭던 봄날마냥 가슴이 설렜습니다.
그 설렘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사겠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지나간 세월, 젊음,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당신은 가족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처음이자 딱 한 번 마주쳤던 그 날, 저도 ‘바그다드 카페’ 그 영화를 보러갔네요.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해주던 소호 근처의 작은 극장 ‘안젤리카’는 그 시절 제 외로움을 위로해주던 참 고마운 존재였지요. 중국인이던 남편이 호모섹슈얼이란 걸 알게 된 건 결혼한 지 한 삼 년쯤 되었을 때였어요. 외로웠던 날에 부딪친 호의로 가득 찬 당신의 눈빛에 저는 울고 싶었어요.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는 과장된 느낌은, 제가 너무 외롭고 힘들었던 까닭이겠죠…. 영화 바그다드카페 속의 여주인공처럼 그 시절 저도 좀 뚱뚱했어요. 뚱뚱한 여주인공이 무거운 가방을 끌고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장면, 그 배경 음악인 'calling you' 그 시절 누구나 반하지 않을 수 없던 노래,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저랑 너무 닮아서, 아니 그때 내 맘이랑 너무 닮아서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보았네요.
그 영화를 본 후 저는 한동안 마술을 배우러 다녔어요, 영화 속의 뚱뚱한 주인공이 주유소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장면이 너무 좋아서요. 마술이든 밥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니 가장 힘이 센 돈을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인간은 모름지기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어야 옳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도 춥지 않은, 아니 사람뿐 아니라 개도 사슴도 사자도 호랑이도 판다도 돼지도, 세상의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다 공존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아, 제가 세상에서 가장 선한 소와 닭을 빼먹었네요. 그 착한 동물들은 그저 제 몸 다 받쳐 인간을 위해 살기 때문에 대접도 못 받고 살다 가지요. 고기에다 달걀에다 아침에 깨우는 알람 소리까지 들려주는 닭보다 못한 인간들을 저는 혐오해요. 제 남편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호모섹슈얼이라 해도 저는 좋았어요. 그렇게 타고났다면 어쩌겠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나빠 보이지 않았던 제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많은 돈을 요구했어요. “그동안 살아준 값을 내라고.” 뭐 그러면서요. 순간 살의를 느낀 저를 이해하세요. 남편을 죽여 영화 속의 사막 속에 파묻고 싶었어요. 바로 그 순간 제 앞에 나타나 온 눈빛으로 제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해준 당신, 조그만 그림 하나 사고 싶다는 말에 감동한 속물이라 해도 할 수 없어요.
그 시절, 저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외로웠네요.
당신의 이름이 앨런, 그 이름을 제 삶이 힘들 때마다 가끔 떠올렸어요. 어쩌면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