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사치스럽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북한에서 살던 삶에 비하면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고 있는데도, 사치란 늘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지요. 프라이어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제게 주신 책 중의 하나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였어요. 참 오래된 책이지만 제겐 그 책의 내용이 참 마음에 남네요. 특히 주인공이 “나는 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라고 말하는 구절, 맞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 수많은 낯선 사람들의 고마운 친절, 그중의 하나가 딸아이의 아버지네요. 사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살아있지도 못할 거예요. 하긴 내 하나뿐인 보물인 딸아이가 없는데 더 살아서 뭐하겠어요?
그런 생각 저편에 “그래도 살아야한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네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머니인지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인지 제 탈북을 도와준 딸아이의 아버지인지 체 당신인지 프라이어 선생님인지, 아니 그 목소리가 다 한 사람의 목소리인 것처럼 들려왔어요. 아바나에서 산티에고 드 쿠바로, 까마구웨이로, 쿠바를 여행하면서 저는 늘 사랑하는 체 동무를 찾았었지요. 아바나의 밤거리는 자본주의 광고판이 없는 탓에 화려하지 않은 어둑한 가스등 불빛으로 중세의 거리를 걷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 들었어요.
평양의 밤거리보다는 훨씬 사치스러운 아바나의 밤거리가 전 참 좋았어요. 쿠바의 온 도시들에 체 게바라의 환영들이 떠돌았죠. 커다란 건물의 낡은 벽들과 가게에서 파는 수많은 티셔츠에 온통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어요. 아- 이 나라는 체 게바라를 팔아먹고 사는 거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언젠가 제 고향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들과 사진이미지들을 팔아먹고 사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죠. 진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자유로운 북조선을 찾아가 묘향산도 가보고, 당신과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주체사상탑도 가보고, 그 맛있는 원조 평양냉면도 먹어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살아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딸아이는 참 하고 싶은 게 많은 활기찬 아이였지요. 대학 강의실로 갑자기 쳐들어와 무차별 총기를 휘둘러 딸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용서하라고, 제가 다니는 조그만 한인교회 목사님은 말씀하셨죠.
딸아이를 죽인 범인은 총기에 미친 외톨이였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교리는 제겐 너무 벅차요. 이러려고 이 먼먼 미국 땅을 찾아온 건 아닌데, 여기가 천국이라 믿었던 건 제 불찰이었어요. 하긴 우리 사는 세상에 천국이 어디 있을까요? 천국도 지옥도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그 뻔한 말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우리는 뭔가를 팔지 않으면 살 수 없죠.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팔 수 있는 게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죠. 아직도 온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체 게바라의 정신과 열정은 이제 관광 상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요. 평양에 살고 있을 때, 남조선은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팔아먹고 산다고 들은 기억이 나네요. “우리는 아무것도 팔아먹지 않는다. 우리의 위대한 자존심을 먹고 산다.” 그때만 해도 전 그게 진실인 줄 알았어요. 하긴 그것도 부분적 진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시절 우린 팔 게 너무 없었어요. 여행 중 저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꿈을 꾸었어요. 꿈속에서 세상 떠난 딸아이가 나타나 “엄마 나 사실은 안 죽었어.” 하는 거였어요. 저는 딸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어디 갔다 이제 왔어?” 하며 흐느껴 울었어요.
깨고 보니 꿈이네요. 하긴 삶이 다 꿈이죠. 이왕이면 아름다운 꿈속에서 살고 싶어요, 제 딸아이는 꼭 그렇게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주체사상탑 앞에서 만나자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아름다운 쿠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지도 모르죠.
시가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좋았을 거예요. 석양이 질 무렵 당신이 시가 공장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면 저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세상의 모든 상상은 때로 저를 행복하게 하네요. 딸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정말 당신의 딸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