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향해 떠나기 전날 프라이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영화 두 편을 보여주셨어요. 그 중 하나가 쿠바 아바나를 배경으로 한 ‘치코와 리타’라는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영화였어요. 영화 속 치코의 연주와 리타의 노래는 황홀했고, 아바나 거리는 꿈처럼 아름다웠어요.
영화를 보고 난 뒤 프라이어 선생님은 말씀하셨죠. “다음에 상영하는 영화는 가슴 아픈 영화입니다. 특히 태옥에게는 더 할 겁니다. 하지만 산다는 건 어제의 역경을 딛고 내일을 향해가는 길에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숙제 같은 겁니다. 인간의 인권이 얼마나 고귀한지, 이 다큐를 보며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그날 본 두 번째 영화는 그 장면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것이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 온몸에 피멍이 드는 것 같았어요. 다큐 ‘14호 수용소’는 말로만 듣던 북한 수용소에 관한 처참한 기록이었어요. 이 잔인한 기록을 굳이 제게 보게 하는 프라이어 선생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저는 섭섭한 생각이 들었어요. 결코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상상들에 관한 한 탈북자의 고백이 가슴에 사무쳤어요. 그는 어떻게 저 끔찍한 기억들을 다시 되살릴 수 있는 것인지 마음이 아파왔어요. 다시는 지구 상에서 저질러지면 결코 안 될 그런 기록들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고 영화를 만든 감독은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젊은 탈북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면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네요. 수용소에서 태어나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옥수수죽만 먹으며 겨우 몸 하나 뉠 수 있는 방에서 자고 여섯 살 때부터 땅속에 내려가 어른들이 파낸 석탄들을 모아 날랐던 주인공의 생애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를 따라 공개처형을 보러 가서 총소리를 듣고 놀랐을 때의 기억이라 하네요. 산등성이 따라 철조망이 있고 양쪽에 탄광이 있는 논밭의 기억, 놀랍게도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바로 자신이 태어난 그 정치범수용소 자리에 수용소가 아닌 논밭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심어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살고 싶다 말했어요. 사람들이 돈 때문에 쩍하면 자살하는 남한도 아니고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가 나온 신문의 한 구석을 모르고 담배를 말아 피다 수용소에 끌려오는 사람이 존재하는 그런 북조선도 아니고, 그냥 욕심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을 천국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어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는 ‘체’ 당신을 멀리서라도 딱 한 번만 보고 나서 죽으려 하던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아마도 프라이어 선생님은 그런 제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서너 숟가락 정도의 옥수수죽과 운이 좋으면 쥐를 잡아 불에 구워 뼈까지 다 먹었던 기억들에 대해 그는 말했어요. 수용소에 사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하다고. 인간이란 참 이상한 동물이어요. 맘만 편하게 먹으면 삶이 활짝 핀 꽃밭 같을 텐데도 남한 사람들은 쩍하면 자살을 하죠. 영화 속 젊은 탈북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 힘든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비교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살자가 많은 남한사회가 북한의 수용소보다 더 문제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끝없는 욕심을 지닌 인간의 본질 때문이죠. 창조주 하느님께 물어보고 싶어요. 왜 인간은 이렇게 불완전한지. 소유할수록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믿음이 살수록 무럭무럭 자라나네요.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 내게 남은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그게 공개처형을 하는 얼어붙은 겨울 풍경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죠. 할머니가 동지팥죽을 쑤는 풍경이 떠오르네요. 평양의 눈 덮인 겨울, 우리는 그럭저럭 먹고 살만했고 그렇게 살게 해주시는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 늘 감사했어요. 겨울날 햇빛이 마루에 가득한 어느 일요일 벽에 걸린 김일성 김정일 부자 사진을 향해 부모님을 따라 고개 숙여 절하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그들을 이렇게 배반하게 될지 그때는 진정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