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와 미국이 오랜 단절 끝에 수교를 하게 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며칠 뒤, 저는 쿠바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미국에서는 쿠바에 친척이 있는 쿠바 이민자들만이 갈 수 있었던 먼 나라 쿠바. 제게는 체, 당신이 살고 있는 가슴 뛰는 나라였지요. 말 안 해도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평양을 떠난 이후 제게 삶은 고통스럽고 긴 여행이었어요. 지금도 여행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앞서네요. 짐을 싸서 기차를 타거나 배를 타고 강과 바다를 건널 때마다 제게 여행은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나 북한의 요독 수용소로 가는 길이라는 섬뜩한 생각이 들어요. 그보다는 차라리 갑자기 떠나야 하는 저승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지요. 그래서 저는 짐 싸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쿠바, 당신을 향해 떠나가는 이 여행길은 얼마나 행복한 길이어야 할까요? 당신과 나의 딸,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은 저를 용서하세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아빠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면,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아무런 소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날아갈 듯이 가벼운 미제 샘소나이트 가방 안에 평양에서는 한 번도 쓸 수 없었던 질 좋은 미제 치약과 칫솔과 시내의 한국 서점에서 산 『평양의 영어 선생님』이라는 책 한 권과 미제 종합 비타민들을 챙겨 넣었어요. 이것들은 말로만 들은 아우슈비츠나 요독 수용소에서는 반입이 불가능한 사치품들이죠. 저는 이 여행이 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소중한 여행이라는 비장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저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딸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면 체 당신은 저를 미쳤다고 하겠지만, 제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당신이 쿠바에 살아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네요. 탈북한 뒤 쿠바로 흘러 들어가서 시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촌 소식을 들은 것도 얼마 전이네요.
그녀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도 저를 잠시 들뜨게 했어요. 하룻밤 지나면 탈북의 시간 동안 도착했던 공포와 불안의 장소들이 아니라 꿈에서만 그리던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다는 일이 믿기지 않았어요. 비행기 표를 사주시고 아바나에 사는 지인까지 공항에 나오게 배려를 해주신 고마운 프라이어 선생님도 쿠바 출신 이민자셨어요. 눈썹이 짙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룸바를 잘 추시는 선생님은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죠. 그건 정말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그런 사랑이었어요. 그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저를 보고 쓸쓸하게 웃으며 말씀하시곤 했었죠. “태옥, 당신을 사랑하기엔 나는 너무 나이 들어 버렸어요.”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사랑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생님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죠. 그럴 때마다 저는 당신을 생각했어요.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음 생에는 꼭 이루어지리라는 소망. 아니 이루어진들 아닌들, 우리들의 삶은 다 한낱 꿈이려니,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것도 다 꿈이려니, 그런 생각을 하면 가난한 인도사람들처럼 행복해졌어요. 낮은 계급으로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할수록 다음 생에는 귀하고 복된 몸으로 태어난다는 인도인들의 믿음을 언제부터 가슴속 깊이 간직했는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당신을 처음 본 날부터인지도.
평양에 살 때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믿으라고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북조선 매스컴을 들을 때마다 저는 귀를 틀어막았어요. 저와 친했던 친구들 몇 명도 그랬지요. “뭐 이렇게 막힌 골목길이 있는가?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별천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로 대화하며 밤을 지새웠던 친구들도 탈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운 좋게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은 많지 않지요.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에 대한 꿈을 내게 심어준 내 사랑 체, 쿠바를 향해 가는 제 마음은 너무 떨려서 갑자기 멈출 것만 같았어요.
프라이어 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을 같이 배운 한국 이민자 출신 친구 하나가 어느 날 제게 준 책 제목이 『황홀한 쿠바』였어요. 한국의 어느 화가가 쓴 쿠바 여행기 『황홀한 쿠바』를 저는 가슴 속에 품고 잤어요. 책 속에는 화가가 그린 쿠바의 풍경들이 그려져 있었죠. 시가를 문 길가의 악사들, 살아온 세월이 목소리로 여문 늙은 여가수, 쿠바를 대표하는 칵테일 이름 모히토, 그 이름도 유명한 쿠바 시가 고히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