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만 희망은 없었다. 허락을 얻어 길게 지속될 행복의 가망도 없었고, 지금까지 익히 그래왔듯이 가볍게 욕망을 충족시킬 가망도 없었다. (…) 이 사랑에 동반되는 어두우면서도 아름다운 비애, 그 어리석음과 절망조차도 놀라웠다. 온갖 상념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아름다웠다. (…) 그렇다고 이전보다 더 지혜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더 노련해졌으며, 그의 영혼이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더 성숙하고 풍요로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그는 소년이 아니었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90~191쪽.
융은 ‘그림자’의 존재에 대해 겁먹지 말 것을 주문한다. 융의 제자인 M-L. 폰 프란츠도 <인간과 상징>에서 그림자를 친구로 만든다면 그림자는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림자가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냐 적이 될 것이냐는 대체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림자는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오해할 때만 적대적이 된다.” 그림자는 우리가 때로는 굴복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사랑을 주며 함께 살아가야 할 여느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그림자를 바이러스처럼 ‘퇴치’할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함께 대화하고, 친구가 되고, 그림자와 소통함으로써 그림자의 어두운 힘을 밝은 쪽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에고가 기꺼이 자아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개성화 과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래브라도 반도의 숲에 살고 있던 나스카피 인디언들은 자신의 내적 중심을 매우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형태로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 나스카피 사냥꾼들은 평생에 걸친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적인 목소리와 무의식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그들은 종교적 지도자도, 축제도 없고, 정해진 관습도 없이 오직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법’만 기대어 인생의 모든 통과의례를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자기 안에 ‘내면의 동반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영혼의 동반자를 ‘미스타페오’라 불렀다. 미스타페오는 저마다의 심장에 살며 불멸의 존재로서 마치 수호천사처럼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준다.
우리 내부에 타고난 ‘위대한 사람’은 그 존재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그를 수용하는 사람 내부에서 훨씬 현실적인 형태를 띤다고 한다. 즉 자기 안에 영혼의 동반자, 위대한 현자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의식하려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진정한 개성화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된다. 예컨대 나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에고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재능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의식과 통합되지 않으면 그 잠재적 재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에고가 스스로의 재능을 알아차릴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살아 꿈틀대는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나르치스를 떠나 홀로 방랑의 길에 오른 골드문트는 이제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이 자기 안의 ‘위대한 사람’뿐이다. 그는 이제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인생의 고비를 맞을 때마다, 자기 안의 ‘영혼의 동반자’와 대화를 나누며, 깊어지고, 넓어지고, 풍요로워진다.
출산을 구경하기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산모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지 새로운 체험만큼 갑자기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적어도 여기 산모의 얼굴에서 감지한 그 무엇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 여겨졌다. (…)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에 다른 여자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것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 고통과 쾌락이 마치 자매지간처럼 서로 비슷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놀라웠던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05~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