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꽃이나 팔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신하고 아버지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독립해야만 했는데! 왜 내게서 독립을 빼앗아 갔어요? 나는 뭘 위해서 그걸 포기한 거죠? 이제 좋은 옷이 아무리 많아도 노예와 마찬가지예요.
히긴스: 전혀 아니야. 난 너를 양녀로 삼고, 원한다면 돈을 줄 수도 있어. 아니면 피커링과 결혼하는 건 어떠니?
리자: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당신이 청혼하더라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으니까요. 프레디 힐은 하루에 두세 번씩 나한테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것도 몇 장씩이나.
히긴스: (불쾌하게 놀라서는) 더럽게 뻔뻔스럽군!
(…) 리자: 모든 여자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요. (…) 내가 그 일을 했던 건 옷을 얻거나 택시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가 같이 있으면 즐겁고,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좋아하게 돼서 했던 거에요.
-버나드 쇼, 김소임 옮김, 『피그말리온』, 열린책들, 2011, 193~195쪽.
작가 버나드 쇼는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일라이자가 로맨스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남자 주인공과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라이자는 히긴스가 청혼한다고 해도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밀당’도 애교도 아니었다. 일라이자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일라이자는 결국 프레디와 결혼한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이 공들여 조각해 낸 갈라테이아는 결코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피그말리온을 존경해도 좋고, 피그말리온을 친구삼아도 좋지만, 피그말리온과 결혼하지는 말라고. 그건 참 불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너무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당신을 거의 만들다시피 했다고 해도, 지배당할 필요도 결혼해줄 필요도 없다고. 그렇다. 지배와 사랑은 다르다. 사랑이 존경으로 승화할 수는 있지만 존경이 곧 사랑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오드리 헵번이 일라이자를 연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결말도 좋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두 사람의 포옹이나 키스 같은 상투적인 결말이 아니라, 홀연히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일라이자가 미칠 듯이 반가우면서도 차마 다정하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히긴스의 뚱한 표정과 일라이자의 새침한 미소로 끝나는 것이다. 관객들은 희망을 가지고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작자 버나드 쇼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우리를 계몽하고 지배하고 소유하기 위해 관계가 시작되더라도, 그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도 사랑은 눈부시게 피어날 수 있다고. 그 미묘한 희망의 메시지만으로 충분히 설레고, 충분히 감동적이다. 버나드 쇼는 더욱 시니컬한 결말을 원했다. 갈라테이아는 결코 피그말리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녀와 그의 관계는 너무 신성해서, 전적으로 좋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전원교향악』의 피그말리온, 목사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제르튀르드의 개안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자 목사님은 기뻐하기는커녕 불안감에 휩싸인다. 제르트뤼드가 눈을 뜬다면, 그녀가 과연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가 눈을 뜬다면, 과연 그녀가 내가 사랑하던 그녀 그대로일 수 있을까. 목사님은 불안에 떨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수술을 허락한다. 마침내 그녀가 눈을 뜬 날. 온 세상이 얇디얇은 살얼음판으로 이루어진 듯 불안했던 그들만의 ‘침묵의 세계’는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만다. 제르트뤼드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자신이 목사님의 사랑을 차지해버렸기 때문에 고통받은 부인의 아픔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한다고 믿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했던 바로 그 얼굴은 목사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크의 얼굴이었음을 깨닫고 절규한다. 목사님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 세상은 목사님이 편집하고 교정한, ‘목사님 판 세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현대사회의 갈라테이아들은 피그말리온의 은혜를 반드시 갚을 필요가 없다. 신화시대의 갈라테이아에게는 여성의 주체적 결단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의 결말이 ‘피그말리온만의 독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그말리온과 히긴스, 피그말리온과 목사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단지 갈라테이아의 외모를 조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다. 모두가 그녀를 조각상이라 생각했지만, 피그말리온에게는 이미 살아있는 여신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가 조각상이 아닌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키스해주기를, 안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히긴스처럼 그녀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도 않았고, 목사님처럼 그녀가 영원히 앞을 못 보는 상태에 머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의 발음을 교정해 숙녀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녀에게 ‘아름다운 세상’만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살아 움직여주기를,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사이에 순수한 사랑과 기도가 있었다면, 히긴스와 일라이자, 목사님과 제르트뤼드 사이에는 뜨거운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이 제게 시력을 되찾아주셨을 때 저의 눈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태양이 이토록 밝고 대기가 이토록 반짝이며, 하늘이 이렇게 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의 얼굴이 이토록 걱정으로 가득 찬 모습이리라는 것 역시 상상하지 못했어요. (…) 제가 처음 본 것은 우리의 과오, 우리의 죄였어요. 그러지 마세요, ‘만일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키려 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보이는 걸요. (…) 자크를 보게 된 순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님이 아니라 바로 자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자크의 얼굴이 바로 목사님의 얼굴이었던 거예요. 제가 상상하던 목사님의 얼굴 말이예요. 아아, 목사님은 왜 제가 자크를 밀어내게 하셨어요? 우린 결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앙드레 지드, 김중현 옮김, 『전원교향악』,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06~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