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vs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⑤
개츠비 vs 블랑시: '아메리칸'에게조차 닫혀 있는, '아메리칸 드림'
아메리칸 드림이란,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며, 모든 이들이 보다 향상되고 부유하고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꿈이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임금을 갖는 꿈이 아니라 모든 남녀가 그들이 타고난 능력의 최고도에 이를 수 있고 출신이나 지위로 인한 우연적인 환경과 무관하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로 인정받는 그러한 사회질서에 대한 꿈이다.
―제임스 아담스, 『아메리카의 서사시』 중에서
틈만 나면 화려한 파티가 열리고, 세계박람회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북적거리는 개츠비의 대저택. 안주인도 아이들도 없는, 집주인마저도 ‘현실’ 바깥으로 탈출해버린 이 저택은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화려하지만 공허하다. 어차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며진 이 저택은 집 전체가 개츠비의 부를 과시하는 ‘광고’처럼 보인다. 개츠비는 이 집만 있다면, 이렇게 자신의 성공을 완벽하게 과시할 수 있는 증거물만 있다면, 가난 때문에 자신을 버린 데이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을 빌려 비유하자면, 개츠비가 ‘광고’라면 데이지는 ‘상품’이며, 톰은 ‘자본가’의 이미지에 가깝다. 온몸의 세포가 화려한 ‘광고’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 개츠비. 온몸의 세포가 ‘상품’이 약속하는 쾌락으로 구성된 듯한 데이지. 그러나 광고는 환상을 창조할 뿐 환상 그 자체의 주인이 아니다. 상품(데이지)이 약속하는 환상의 소유자는 광고(개츠비)가 아니라 자본가(톰)인 것이다.
블랑시와 개츠비의 공통점은 ‘부’에 대한 실용적 관점의 결핍이다. 그들은 화폐를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할 뿐이다. 블랑시는‘벨 리브’에 살고 있을 당시 누렸던 행복을 되찾기 위해, 개츠비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까지 낳은 옛 애인 데이지를 찾기 위해. 블랑시와 개츠비에게 아주 약간의 ‘실용적 마인드’만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깨달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만든 환상에 스스로 매혹되는, 그 매혹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따위’는 얼마든지 망각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블랑시와 개츠비는 ‘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부를 자신의 부귀영화를 지속시키는 데 실용적으로 써먹지 못한다. 그들은 부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블랑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과 낭만을 실현시키는 데, 개츠비는 사랑했던 여자를 유혹하는 데, 즉 부를 철저히 ‘비생산적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듯 블랑시와 개츠비는 급속히 자본주의화되어가는 세계에서 약삭빠르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였던 셈이다. 블랑시는 궁정식 사랑을 꿈꾸는 서유럽의 귀족 자제 같은 전근대적 분위기를, 개츠비는 자신이 이룬 ‘부’를 스스로 낯설어하며 오직 한 여자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부를 사용하는 시대착오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에게는 ‘부’ 자체가 팔요한 것이 아니라 ‘부’로 실현 가능한 낭만적 환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래할 ‘아메리칸 드림’의 대중화 시대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던, 미국 사회 내부의 이방인들이었던 것이다. 화려한 파티와 거대한 저택과 꿈에 그리던 그녀를 동시에 앞에 두고서도, 개츠비는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오히려 데이지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불안해지며, 마침내 그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데이지가 그의 환상 속에 거처하던 데이지보다 ‘덜’ 아름답다는 것을,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을 예전처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것마저 ‘모른 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데이지와 그의 남편 톰이었다. 오랫동안 톰의 내연녀였던 머틀 윌슨이 데이지가 운전하던 자동차에 치여 즉사하자, 톰과 데이지는 공모하여 ‘범인’을 개츠비로 몰아가고, 머틀의 남편 윌슨은 개츠비를 총으로 쏘아죽이고 만다. 개츠비는 결국 톰과 데이지가 살아가는 ‘그들만의 리그’를 사수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그토록 화려했던 명성과 소문에 걸맞지 않게 오직 세 사람만이 참석했던 개츠비의 쓸쓸한 장례식. 개츠비의 비참한 최후 못지않게 블랑시의 최후도 참혹하다. 그녀와 교제하고 있었던 미치에게 블랑시의 복잡한 애정행각과 과거사를 모두 폭로해버린 스탠리. 미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공황상태에 빠진 블랑시를 스탠리가 겁탈함으로써, 마침내 그녀의 마지막 자존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만다. 동성애자였던 남편의 충격적인 자살과 가문의 몰락 이후 기댈 곳이 없어 방황하던 블랑시는 ‘낯선 남자들의 호의’에 의지해 살아왔고, 직장도 잃고 명예도 잃고 돈도 잃어버린 채 마지막 은신처로 동생의 집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은신처야말로 그녀의 몰락이 완성되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총을 쏘아 자살했던 장면을 잊지 못하며 극도의 신경쇠약 상태에 빠졌고, 스탠리의 협박과 겁탈은 그녀의 인격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스탠리는 태연자약하게 블랑시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고, 이제 ‘제정신’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블랑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해져가는 표정으로 관객에게 쓸쓸한 작별인사를 고한다. 마치 자신을 끌고 가는 낯선 남자(정신병동 의사)가 자신을 구해줄 백마 탄 왕자라도 되는 것처럼.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는 항상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왔어요(Whoever you are,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
1925년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려낸 개츠비와, 1947년 테네시 윌리엄스가 그려낸 블랑시. 그들은 모두 급속히 자본주의화되어가는 사회의 가파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들이었다. 블랑시가 아메리칸 드림에 내재된 속물성의 실용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개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의 공허한 성공과 궁극적 실패를 암시한다. 구시대의 습속과 계급의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상을 과시했던 아메리칸 드림. 그 ‘취지’를 믿는다면 진정 환상적 유토피아처럼 들리는 아메리칸 드림은 그 ‘낙오자’들을 철저히 ‘게으른 자, 무능한 자, 시대착오자’로 낙인찍음으로써 ‘궁극적 불평등’을 합리화시킨다. 블랑시와 개츠비는 도래할 아메리칸 드림의 필연적 실패를 예견하는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의 절실한 환상을 백일몽 취급 하는 세계의 잔혹성 뒤에는 넘어설 수 없는 ‘계급’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블랑시는 철저히 몰락한 계급을, 개츠비는 갑자기 상승한 계급을 대변하는, 불안한 정체성의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며 초강대국이고 모든 사람들의 절대적인 모델이라고 한가롭게 확신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자연자원, 테크놀로지, 그리고 군비에 정초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이 된 유토피아라는 기적 같은 전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게 그 사회가 다른 사람들이 꿈꾸어오던 모든 것(정의, 풍요, 법의 통치, 부, 자유)을 실현했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는 기적 같은 전제 위에 정초되어 있다. (……) 미국사회는 이를 알고 있고, 그것을 믿고 있으며,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믿게 되었다.
―장 보드리야르, 주은우 옮김, 『아메리카』, 문예마당, 1994, 144~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