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빈다는 젊은 시절의 친구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치 신분이 높은 귀족에게 하듯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기 갈 길을 떠나갔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싯다르타는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그를, 그 충직한 친구, 그 고지식한 친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자기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 뒤의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한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37쪽.
싯다르타는 ‘옴의 전체성’을 깨달은 후 벅찬 감격과 함께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영겁의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깊고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자, 그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고빈다가 와 있다. 오랫동안 수행자 생활을 계속해 온 고빈다의 맑고 단정한 영혼 앞에서 싯다르타는 경의를 표한다. 마침 싯다르타가 누워서 혼곤한 잠에 빠져든 바로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고빈다는 변해버린 싯다르타의 외모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홀로 외롭게 잠들어 있는 나그네를 보고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걱정이되어 싯다르타의 곁을 지킨다. 싯다르타가 깨어나자 반가움에 목이 매어오는 싯다르타와는 달리,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싯다르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고빈다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싯다르타는 향락과 탐욕의 삶에 찌들어 옛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실망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제 ‘부끄러운 자아’와 결별하여 예전의 자신, 아니 그 이상의 자신에 도달하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영적 부활에 도달한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이라면 이런 상태를 ‘외면에서는 죽고, 내면에서는 살아났다’고 보지 않았을까. 싯다르타는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 자신의 외면이 한 번 죽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물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과의 만남을 통해 옴의 전체성에 도달한 순간, 그의 죽어있던 내면은 되살아난다. 융 또한 이런 외면의 죽음과 내면의 부활을 경험했다. 융의 영적 체험이 고도의 시적 상징으로 녹아 있는 책, <레드북Red Book>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날 밤 나는 내가 죽었음을 알았다. 나의 내면은 죽음에 접어들었고 나는 외면의 죽음이 내면의 죽음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외면에서는 죽고 내면에서는 살아있기로 결심했다. 나는 몸을 돌려 내면의 생명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극도의 심리적 고통을 겪어 ‘걸어 다니는 정신병동’과 다름없는 시간을 통과해 낸 융은 외면의 죽음보다는 내면의 삶이 훨씬 가치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즉 외면이 죽어야만 내면이 살아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융은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극심한 내적 혼란을 겪는다. 그는 자신이 미쳐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기 심리 진단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는 익숙한 의학적 지식을 동원하기에 앞서 자기만의 적극적인 상상력의 실험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의식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이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한다. 즉 꿈에서 무의식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다가 사후적으로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에게 말을 거는 능동적인 무의식과의 만남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깨어 있는 몽상, 즉 낮에 눈을 뜬 채로 꾸는 꿈을 통해 환상의 실체에 접근하고 무의식의 마그마와 만나는 적극적 상상을 통해 내면의 부활을 꿈꾼다. 외면으로는 살아있지만 내면으로는 죽어 있는 의식의 마비상태가 아니라, 겉으로는 죽음처럼 고요한 삶을 살지만 내면에서는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무의식의 움직임에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 그것이 싯다르타가 경험한 ‘영적 부활’이었고, 융이 경험한 ‘무의식의 발견’이 아니었을까.
결국 내가 단지 또 다시 어린애가 되고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얼마나 많은 악덕, 얼마나 많은 오류, 얼마나 많은 구토증과 환멸과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었다. (....)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지.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