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싯다르타가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때 창가로 걸어갔다. 희귀한 새 한 마리를 잡아 가두어 놓은 금빛 찬란한 새장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새장의 문을 열더니 그 새를 끄집어내서는 날려 보내 주었다. 그녀는 그 새, 날아가는 그 새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날부터 어떤 손님도 더 이상 받지 않고 집 대문도 빗장을 걸어 잠가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싯다르타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26쪽.
융 심리학의 커다란 전제 중 하나는 ‘무의식이 상상 이상으로 의식에게 협조적’이라는 것이다. 즉 히스테리나 발작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무의식이 의식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결국에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의식’을 향해 무의식이 더 큰 깨달음을 전달해주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병리적인 형태로 무의식의 메시지가 의식을 괴롭히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과 건강하게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방식이 바로 스스로의 꿈을 분석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문학작품 속에서 꿈 장면이 그토록 많이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꿈이 지닌 이 대화적 특질 때문일 것이다. 꿈은 무의식과 의식이 은밀하게 만나 서로의 결핍과 이상을 털어놓는 대화의 장이다. 꿈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적 자아가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더 깊은 무의식의 상처나 고뇌, 정서 등을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굳이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수많은 소설가들이 ‘꿈’의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장면을 쓰는 것도 바로 소설가의 ‘의식’은 인지하지 못해도 소설가의 ‘무의식’은 꿈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싯다르타>에서도 꿈의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다. 카말라가 키우고 있던 아름다운 새는 싯다르타의 분신이기도 하고, 그리고 실제로 카말라가 뱃속에서 키우고 있던 싯다르타의 아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듣고도 흔들림 없이 정진했던 역사 속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총명하여 누구도 그를 가르칠 수 없었던 ‘신성한 인간’ 싯다르타는 카말라와의 연애와 아들의 탄생을 통해 ‘세속의 질서’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만약 ‘성聖’의 세계에만 갇혀 ‘속俗’의 지혜를 깨닫지 못했다면 싯다르타는 반쪽짜리 깨달음으로 끝내 불도를 깨우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속의 광풍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다 비로소 ‘마음 속의 어린 새의 죽음’을 꿈속에서 목격한 싯다르타는 드디어 길을 떠나 다시 깨달음의 세계로, 성스러운 세계로 재진입하게 된다.
‘의식’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랜 세월 세속의 유혹과 광기와 사치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있었는지 뼈아프게 깨달은 싯다르타는 극심한 허무와 절망감으로 차라리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은 상태에 도달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출가하던 그 날보다 그의 ‘의식’은 훨씬 지치고, 아프고, 슬픈 상태였지만, 그의 무의식의 바다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더 깊고 따스한 깨달음의 파도로 물결치고 있었다. ‘의식의 싯다르타’가 자살을 결행하려 할 때, ‘무의식의 싯다르타’는 문득 ‘옴’이라는 신비의 소리를 내보내 의식을 각성시킨다. ‘옴’, 그것은 완전한 것,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단어였다. 헤세는 이 소리를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음악소리처럼 그려낸다. ‘옴’이라는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발음한 싯다르타는 금세 자신의 자살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 옴. 그것은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보내는 간절한 구원의 목소리였다. 싯다르타의 지혜로운 무의식이 그의 어리석은 의식을 끝내 구원한 것이다.
바로 그때, 그의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어떤 소리가 경련하듯 부르르 떨며 울려왔다. 그것은 한 음절로 된 한 마디의 말이었는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혼잣말로 웅얼거리듯 그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로서,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옴’이었다. 그리고 그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울리는 바로 그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