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아직도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에게, 맹목적이고도 물릴 줄을 모른 채 마치 바닥이 없는 심연 속으로 뛰어들 듯 쾌락의 늪 속으로 뛰어드는 그에게, 그녀는 근본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쳐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쾌락을 주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으며, 몸짓 하나하나, 어루만짐 하나하나, 접촉 하나하나, 눈길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기 비밀을 지니고 있으며, 인체의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각기 나름대로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은 자극받아 깨어나면 그 비밀을 아는 사람에게 아무 때라도 행복감을 안겨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99쪽.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름이나 외모처럼 겉으로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융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라는 수수께끼를 향해 끝없는 질문을 던졌고, 자신의 ‘자기다움’을 만들어내는 실체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것이 인생의 여정임을 깨달았다. 그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바로 프로이트와의 만남이었다. 리비도를 성적인 에너지로 환원시킨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성적인 욕구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심리의 복잡다단한 에너지의 흐름을 탐구하고 싶었다. 융은 스스로에게 가장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프로이트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견해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는 이 난해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프로이트와의 고통스러운 결별을 받아들이게 된다. 융에게 리비도는 더 이상 허기본능, 공격본능, 성적본능 등으로 환원될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이 모든 현상을 ‘정신적 에너지의 다채로운 표현’으로 보고자 했다. 리비도를 성적 욕구로 단순화시켰던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리비도를 매우 중립적인 에너지의 흐름, 그러니까 어떤 욕망으로 쓰일지 처음부터 결정되지 않는 본원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거의 양적인 개념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리비도에 관한 질적인 본질 규정을 모두 배격했다. 나로서는 그 무렵까지 우세했던 리비도학설의 구체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더 이상 허기본능, 공격본능, 성적 본능 따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이 모든 현상을 정신적 에너지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고자 했다. (…) 리비도를 일종의 에너지로 본다면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 밖의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옮김, <기억, 꿈, 사상>, 376~377쪽.
자기를 찾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아가는 북적북적한 세속의 틈바구니에 자신을 내던져보는 것이다. 융은 수없이 여행을 떠나면서 강연을 하고 책을 쓰고 논문을 쓰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그 혼란의 틈새에서 가장 자기다운 어떤 것을 발견해내고 있었다. 싯다르타 또한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자신을 두려움 없이 내던짐으로써 ‘나다운 어떤 것’을 찾아가고 있었다. 모든 욕망을 거세시키고 오직 영적 탐구에만 생을 바치는 사문들의 삶과 달리, 하루하루 조변석개하는 희망에 생을 거는 사람들, 매일 달라지는 세상의 작은 차이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싯다르타가 카말라에게서 ‘사랑의 기술’을 배웠다면, 카말라에게 ‘사랑의 수업료’로 바칠 돈을 벌기 위해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는 생존의 기술, 경쟁의 기술, 인생의 기술을 배운다. 그런데 이 살아있는 인생 수업에는 커다란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속적인 세계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에 능숙해질수록 그는 자신이 원래 바라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영적인 세계와 멀어질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영혼은 장사하는 데 가 있지 않았다. 물론 자기가 카말라에게 갖다 줄 돈을 버는 데에는 사업이란 유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통하여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예전에 싯다르타는 사람들이 하는 사업들, 수공업들, 근심 걱정들, 오락들이나 어리석은 행위들을 마치 달나라처럼 낯설고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가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상은 오로지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일을 그는 쉽게 해낼 수 있었다. (…) 카말라는 옛날에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이해하였던 것보다 싯다르타를 더 잘 이해하였으며, 그녀는 고빈다가 싯다르타와 닮았던 것보다 더 많이 싯다르타와 닮아 있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04~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