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싯다르타를 사랑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그는 기쁨을 주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그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 자신은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하였으며 스스로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도 못하였다. (…) 싯다르타는 내면에 불만의 싹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 또한 친구인 고빈다의 사랑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자신을 행복하게 하여주지도, 자신을 달래주지도, 자신을 흡족하게 하여주지도, 자신을 만족시켜주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존경할 만한 아버지와 그 밖의 여러 스승들, 즉 지혜로운 바라문들이 자기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지혜를 대부분 전달하였으며, 그들의 풍부한 지식을 자기가 기대하고 이는 그릇 속에 어쩌면 이미 다 부어넣었는데도 그 그릇은 가득 차지 않았고, 정신은 만족을 얻지 못하였으며, 영혼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은 진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였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14~15쪽.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신비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믿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장대한 여정이다. 이 이야기는 위대한 믿음의 뿌리에 가혹한 불신이 가로놓여 있을 수도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탄생하기까지 싯다르타는 혹독한 불신의 심연 속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위대한 인간 싯다르타의 여정은 이렇게 한 오라기의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싯다르타>를 읽으며 믿음을 추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불안과 고독과 만났다. 나는 <싯다르타>를 읽기 전에 고요하고 신비로운 깨달음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맞닥뜨린 것은 우리와 똑같은 의심과 불안과 회의에서 출발한 한 인간의 뜨거운 고뇌였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예정된 왕의 자리는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버리고, 모든 것을 던져 ‘의심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헤세의 눈에 비친 싯다르타, 소설가의 눈에 비친 현인의 마음풍경이다. 실존인물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헤세가 그린 싯다르타는 어디까지나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싯다르타였다.
외부환경으로 봤을 때는 문제를 거의 찾을 수 없는 싯다르타. 한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겪었던 고통의 원인은 오직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융은 자신의 저서 <심리학과 종교>에서 신경증의 원인이 심리적인 상처로 인한 것임을 다각도에서 밝히고 있다. 39도의 히스테리성 열로 고생하던 환자는, 융에게 히스테리의 원인이 되고 있는 심리적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불과 몇 분 후에 치유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떤 심리적 고뇌는 토론만으로도 깊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어떤 육체적인 질병은 대화만으로 치유되기도 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융의 어떤 환자는 온몸에 걸쳐 마른 버짐이 번지는 심각한 피부질환에 걸려 있었는데 몇 주 동안의 심리 치료를 받은 후에 증상이 90퍼센트 이상 치료되었다고 한다. 어떤 환자는 대장 확장을 위한 수술 때문에 약 40센티미터 정도의 대장을 도려냈는데도 불구하고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융은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내밀한 심리적 사실을 알아내었고 그 비밀이 밝혀지자마자 대장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했다고도 한다. 융은 다양한 연구 속에서 ‘심혼psyche’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례를 무수히 들어준다. 그는 말한다. 공상도 또한 현실적인 존재이며 물질적인 조건과 똑같이 현실적이고, 해롭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나는 심리적인 장애는 유행병이나 지진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도대체 어떤 물음표들이 숨어 있는 것일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만드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었을까? 싯다르타와 융과 헤르만 헤세의 과제는 같다.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진리도 깨달음도 믿음도 의심도 불안도 희망도 분노도 마치 한 몸처럼 숨 쉬고 있는 복잡다단한 마음속에는 어떤 깨달음의 열쇠가 숨어 있는 것일까? 싯다르타는 의문을 던진다. 세상을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신들을 위해 갖은 제사를 지내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인간의 이 모든 행위가 과연 행복을 유지해줄 수 있을까? 그것들이 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의 질문은 신의 유일성과 신의 존재 자체를 의문에 부친다. “신들도 너와 나와 마찬가지로 창조된, 시간에 예속되어 있는, 덧없는 피조물들은 아닐까?”
싯다르타는 입고 있던 옷을 거리의 한 가난한 바라문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이제 띠로 겨우 치부만을 가린 채 바느질도 하지 않은 채 흙빛의 베를 겉에 걸쳐 입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딱 한 끼니만 식사를 하였으며, 게다가 익힌 음식은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열닷새 동안 단식을 하였다. 그는 스무여드레 동안 단식을 하였다. 허벅지와 볼의 살이 쑥 빠졌다. 퀭하여진 두 눈에서는 열정적인 꿈들이 가물가물 타올랐으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가락들 끝에서는 손톱들이 길게 자라났고, 턱에는 윤기를 잃은 털이 더부룩하게 자라났다. (…)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싯다르타>, 민음사,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