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러한 이원성과 대립에 바탕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자 아니면 남자로 태어나고, 방랑자가 아니면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성적이지 않으면 감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을 동시에 쉰다거나,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거나, 자유를 누리면서 질서를 찾거나, 충동대로 살면서 이성을 지킨다거나 하는 것은 어디서도 불가능했다. 그중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 쪽을 희생시켜야 하고, 어느 한쪽에 못지않게 다른 한쪽도 소중하고 갖고 싶은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381쪽.
지고의 선만이 아니라 극한의 악까지 표현하고 싶은 것. 인간의 전체성을 이해하고 싶은 것. 헤세와 융은 그 점에서 완전히 통했던 것 같다. 아름답고 화려한 삶만을 살아본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도 발을 담근 자, 그리하여 인간의 이중성을 완전히 통합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 바로 골드문트가 아닐까. 예술적 영감의 대상을 완전히 잃고 방랑하던 골드문트에게 실로 오랜만에, 참혹하지만 너무도 생생한 ‘뮤즈’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인격체로서의 한 여인 레네가 아니라 악의 충동에 순수하게 공감하는 열정적인 쾌락의 얼굴 그 자체였다. 화가들이 메두사나 유디트 같은 인물, 즉 악을 그 자체로 향유하는 인물을 그릴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런 감정이 아닐까.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를 때 그 건장한 목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핏줄기를 바라보며 유디트가 느꼈던 강렬한 쾌감이 바로 레네의 얼굴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골드문트는 죽음과 죄악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더욱 예술을 사랑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그는 죽어가는 레네를 살릴 수도 없었고,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완전히 희망을 잃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골드문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커다란 절망을 느낀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좌절한다. 자신 또한 더 이상 삶에 여한이 없다고도 느낀다. 그러나 그에게 숨길 수 없는 의지, 즉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를 열망하는 생명에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는 골드문트는 백작의 애첩인 아그네스라는 여인과 밀회를 나누게 되는데, 그만 백작에게 밀회를 들켜 교수형에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고장을 정처없이 방랑하며 ‘삶과 죽음의 희미한 경계’위에 살아왔던 골드문트는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거처하길 원하는 곳이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임을 깨닫게 된다. 어떤 고난이 밀어닥쳐도 살아남고 싶다고, 살아남아 다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 뜻밖의 구원이 찾아온다.
골드문트는 자신의 고해성사를 맡은 신부가 감방으로 들어오면 그를 죽여서 옷을 바꿔입은 후 탈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골드문트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찾아온다. 골드문트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러 온 신부가 바로 나르치스였던 것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해주러 왔으며 이제 그는 나르치스가 아니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원장을 맡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나르치스를 생각하며 만들었던 인물의 조각상이 바로 요한이었던 것이다. 둘은 늘 떨어져 있었지만 항상 그렇게 뜻하지 않는 영적 소통의 끈으로 이어져있었던 것만 같았다. 골드문트는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털어놓고 나르치스 앞에서 그 옛날의 어린 소년처럼 비로소 실컷 흐느껴 운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그 옛날의 순진하고 무력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예술이 왜 자신의 운명인지 아프게 깨달은 고행의 방랑자였으며, ‘지켜줘야 할 어린 영혼’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벗으로서 존중할 수 있는 예술가로 거듭나 있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로고스적 세계의 대변자인 나르치스,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에로스적 세계의 대변자 골드문트는 그렇게 다시 극적으로 만난다. 영원히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로고스와 에로스의 합일은 그렇게 성사된 것이다.
“예술이 자네한테 뭘 가져다주고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무상감을 극복하게 해주었네. 사람들이 벌이는 바보짓과 죽음의 무도 가운데서도 뭔가 오래도록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게 바로 예술작품이었어. 예술 작품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불타거나 망가지거나 파괴되겠지. 그래도 예술작품은 인간의 일생보다 훨씬 오래남고, 덧없는 순간을 넘어 성스러운 형상이 충만한 조용한 왕국을 이룬단 말일세. 그런 작업에 일조하는 것이 나에겐 다행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에 영원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413~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