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사람을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 위로 몸을 구부린 채 얼굴의 핏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골드문트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모 마리아여, 제가 살인을 저질렀나이다.’ 자신의 말소리가 귀에 울려왔다. (…) 쾌활한 방랑객의 죽음은 골드문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 눈덮인 황량한 지역을 헤매면서 쉬지도 못하고 길을 잃은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거의 한숨도 못 잤던 골드문트는 엄청난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몸 속에서는 굶주림이 들짐승처럼 울부짖었고, 기진맥진해서 수시로 들판 한가운데 널브러져 눈을 감으면 정신이 아득했다. (…) 너무나 혹독한 곤경 속에서도 죽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느닷없는 기운과 야생적인 본능, 적나라한 생의 충동에서 나오는 엄청난 강인함이 그에게 원기를 불어넣고 그를 도취시켰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16~217쪽.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의식을 뛰어넘는, 알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행동뿐이지만, 바로 그 개인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힘들의 주고받음이다. 칼 융은 개인 위에 있는 어떤 힘이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M-L. 폰 프란츠는 <인간과 상징>에서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눈길을 보내는 순간의 신비를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무의식이 비밀스러운 구도에 따라 자신을 이끌고 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마치 뭔가가 나를 보는 것 같고, 나는 보지 못하는데 나를 보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을 때. 그것이 바로 영혼의 성장을 향한 내적 충동이 눈을 뜰 때다. 이럴 때 무의식의 메시지를 감지하고 그것을 영혼의 성장을 위한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바로 ‘에고’의 적극성이다. 에고는 이 영혼의 성장을 향한 내적인 충동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어떤 목적이나 방향도 강요하지 않은 채, 자신의 내적 충동 자체에 몰두해야 한다.
사람들을 ‘외적인 성취’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무의식의 실현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는 크게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평생 주부로만 살아온 평범한 할머니에게서도 우리는 위대한 현자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은 책을 많이 읽거나 직업에 매진하는 것 같은 의식적 활동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 된다고 해서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향한 운명의 부름을 이행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성취임을 아는 것. 시험에 합격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원하는 직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를 통렬하게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무의식의 뜨거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에고의 성찰이다.
골드문트는 수년 동안 방랑을 계속하면서 점점 자신을 향한 무의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통달하게 된다. 그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을 죽인 일이었다. ‘힘들지 않게 방랑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식으로 골드문트에게 접근해서는, 골드문트에게 뤼디아가 선물한 소중한 금화를 도둑질하려 했던 빅토르. 빅토르는 골드문트를 죽여서라도 그 금화를 빼앗아가려하고, 그 상황에서 오직 ‘그녀가 나에게 준 유일한 선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던 골드문트는 실수로 빅토르를 죽이고 만다. 골드문트의 에고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는다. 자신의 영혼 어딘가에 살인의 충동이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무작정 도망친다. 골드문트는 이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극한상황에 처한다. 그 절대 고독의 상황에서, 숨 쉬고 잠을 자고 먹을 것을 얻는 최소한의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에고에 눈을 뜬다. 그가 가장 대화하고 싶은 가장 그리운 대상은 바로 나르치스였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나르치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골드문트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의 무의식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이제 그가 말을 거는 대상은 나르치스였다. 그는 나르치스에게 새로운 생각과 지혜와 농담을 전해주었다. “나르치스, 두렵니?” 그는 나르치스에게 말을 걸었다.
“무섭니? 뭔가를 알아냈어? 그래, 이봐,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 온통 죽음뿐이야. 울타리마다 죽음이 걸터앉아 있고, 나무마다 그 뒤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 그러니 너희들이 담장을 쌓아올리고, 기숙사와 예배당과 교회를 지어도 아무 소용없다구. 죽음은 창문 안쪽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웃고 있지. 죽음은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있어. (…) 어디, 찬송가를 부르고, 제단에 예쁜 촛불을 켜두고, 저녁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실험실에 들꽃을 모아두고, 도서실에 책을 모아보라구!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18~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