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야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골드문트 자신은 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고향도 없었고, 미지의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찍이 그의 어머니도 그랬었다. 집과 농장, 남편과 자식, 공동체와 질서, 의무와 명예,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어머니는 불확실한 세계로 달아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마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미 그 불확실한 세계 속에 침잠해 있었을 것이다. 골드문트 자신에게 목표가 없듯이 어머니에게도 목표는 없었다.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지 그의 몫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르치스는 이 모든 사태를 오래전부터 얼마나 훌륭하게 통찰하고 있었던가! (…) 나르치스는 금식 기도를 올리고 밤에도 묵상을 위해 세 번씩이나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미 다른 어떤 세계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11쪽.
부처, 예수, 성모, 천사, 어린이 등을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의 신화’를 상징하는 이런 모델적 인물들을 융은 ‘자기원형’이라 부른다. 자기 원형이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유의 자신’이 되게 하는, 무의식 안의 근원적 가능성이다. 요컨대 ‘나’라고 불리는 전체 신화의 밑그림이 바로 자기원형이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이상적 여성상들,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인물들이야말로 이런 자기원형의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가장 나다운 그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무의식의 자아. 이것과 만나기 위해서는 의식이 무의식을 향해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무의식을 향해 말걸기를 시도해야 한다. 의식의 일방성으로 인해 무의식의 목소리가 억압되지 않도록.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식의 자기최면 때문에 ‘나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고 말할 줄 아는 무의식의 솔직한 목소리가 억압되지 않도록. 또는 ‘나는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의 억압 때문에 ‘나는 그것을 꼭 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열망이 숨죽이지 않도록.
골드문트에게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아 준 나르치스의 독설은 처음에는 ‘트라우마’로 다가오지만 나중에는 ‘자기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어머니를 ‘부도덕한 행실’, ‘가문의 수치’, ‘사랑의 배신자’로 각인시킨 아버지의 원한이, 어머니를 향해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골드문트의 ‘자기원형’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억압해왔던 것이다. 비로소 되찾은 어머니의 기억은 아버지의 ‘주입식 교육’과 달리 너무도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사랑스럽다. 어떤 ‘그늘’이나 ‘독성’도 없는, 그저 자유로운 어머니의 영혼 자체를, 골드문트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자유와 창조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어머니의 성정이야말로 골드문트가 아버지에게서는 받을 수 없었던 위대한 유산이었으며, 진정한 개성화의 첫걸음이 된다.
수많은 여성과의 열정적인 만남은 골드문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자기원형’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리제와의 첫날밤을 통해서는 여인의 사랑과 육체에 대한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유리걸식하며 만난 수많은 아낙네들을 통해서는 ‘사랑’이 아닐지라도 ‘관능’ 그 자체로 대화하는 여성의 뜨거운 생명력을 배운다. 훗날 자신의 예술작품에서 묘사하게 될 인간의 숨은 아름다움을, 골드문트는 이 수많은 여성들에게서 배운다. 아름다운 자매 뤼디아와 율리에를 통해서는 ‘애틋한 사랑’과 ‘단순한 관능’의 명확한 차이를 깨닫는다. 뤼디아는 골드문트를 단지 하룻밤 상대가 아닌 진정한 솔메이트로 갈구한다. 하지만 골드문트가 결코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는 사내임을 뤼디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뤼디아는 골드문트를 사랑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귀족 가문에서 우아하고 안락하게 자라온 그녀는 자신의 환경과 쉽게 결별할 수가 없다.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숲에서 잘 수 없어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머리칼에 지푸라기를 묻히고 다닐 수도 없다구요.”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교육 또한 그녀의 공포를 자극한다. “골드문트, 불쌍한 내 사랑, 결국은 당신이 목 매달리는 것을 보고야 말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감금되었다가 수녀원으로 보내질 거예요.” 골드문트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매혹적인 남성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율리에. 골드문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매혹시키는 이 두 소녀를 통해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쾌활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슬픔뿐이에요. 당신의 눈은 마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거든요. 당신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슬퍼 보여요. 당신한테는 고향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은 숲속에서 나타나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당신은 언젠가는 다시 길을 떠나 이끼 위에서 잠을 자면서 방황을 계속할 테죠. (…) 아, 당신은 온 세상을 두루 방랑하겠지요. 모든 여성들이 당신을 좋아할 테지만,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고독할 거예요. 차라리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세요. 저한테 그토록 많이 얘기했던 그 친구를 찾아가세요. 저는 당신이 언젠가 숲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가지 않도록 기도를 드릴게요.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82~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