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그녀는 어머니가 보낸 전령이었다구. 내 가슴에 피어난 꿈처럼 갑자기 낯 모르는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온 거야. 그녀는 내 머리를 품에 안고 있었지. 나에게 꽃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를 사랑해주었지. 첫 입맞춤에 나는 금방 몸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야릇한 통증을 느꼈지. 이제껏 느껴온 모든 그리움과 꿈,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온갖 달콤한 불안과 비밀이 깨어나서 모든 것이 변모하고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지. 그녀는 여성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비밀을 간직한 존재인가를 나에게 가르쳐주었어. 그녀 덕분에 나는 불과 반시간 사이에 나이를 몇 살은 더 먹은 셈이야. 이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이제 이 수도원에 단 하루도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것도 불현 듯 알게 되었지. 어두워지는 대로 떠날 거야.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26쪽.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버림받는다는 것,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수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은다. 가장 절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늪을 건너야만 한다고. 융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도움을 주는 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버림받았을 때, 혹은 가장 심각한 외로움의 상태에 있을 때뿐이라고. 가장 두려운 순간, 가장 끔찍할 것이라고 믿었던 순간 생각지도 못한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융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가장 빛나는 영적 에너지를 발견해내는 현상을 ‘에난치오드로미Enantiodromie’라고 불렀다. 에난치오드로미. 그것은 반대극으로의 역전을 뜻하는데, 융은 이렇듯 극과 극이 서로를 향해 끌리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생명의 법칙이라 말한다. 지성의 길을 추구하는 나르치스가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골드문트에게 끌리고, 열정과 낭만이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는 골드문트가 절제와 고행을 천직으로 삼은 나르치스에게 이끌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로 반대되는 대극의 본질적 통합’을 향해 걸어가고자 하는 무의식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이 길을 반드시 가고 싶은데, 이 길로 가면 내 삶이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 같다’는 두려움. ‘이 사람을 분명 사랑하는데,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최악의 수렁에 빠질 것 같다’는 두려움. 서로 대립되는 욕망이 우리 안에서 정확히 같은 힘으로 투쟁하는 느낌이 들 때. 이런 느낌이 바로 ‘대극’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잘 드러낸다. 영혼의 성숙은 바로 이런 끔찍한 역설을 피하지 않고 자기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가장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욕망을 결합시킬 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인격의 적대적인 양극을 결합시킬 때, 오히려 마음의 내란은 극복될 수 있다. 에난치오드로미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그 반대편의 극으로 돌아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적 개념을 융이 심리학의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과 정반대되는 삶을 향해 미친 듯이 이끌리는 것. 예컨대 격렬한 반기독교론을 펼치던 사도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신의 환상과 대면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는 일 같은 것. ‘결코 내 이상형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불가해한 사랑 같은 것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향해 끌리는 자신의 마음이 ‘위험하다’고 느낀다. 골드문트의 존재 자체가 지금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유혹이었다. 수도원이 요구하는 규율보다 오히려 더욱 엄격하게 자기를 단련해왔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해 눈길을 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소스라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향해 자석처럼 이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어떤 감정을 향해 굳이 이름표를 달지 않는 골드문트의 순수함은 사람을 향한 이끌림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규율과 통제, 질서와 조화, 지식과 관찰을 소명으로 삼아 온 나르치스는 자신의 진정한 결핍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살아있는 예술작품, 골드문트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더라도, ‘반드시 성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어울리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골드문트의 ‘잠든 의식’을 깨우고자 한다. 골드문트는 아직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리고 있는 예술의 열정, 사랑의 불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날선 언어, 뼈아픈 질책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거대한 무의식의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를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어머니의 기억이었고, 아름다운 집시 여인 리제와의 첫사랑이었다.
여자와 사랑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사랑은 사실 그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자는 단 한마디로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지정해 주었고 다른 모든 것은 말로 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말한 것일까? 그래,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다소 쉰 목소리에 깃들인 모종의 울림으로, 어쩌면 향기인지도 모를 그 무엇으로 말했다. 살결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그 부드러운 향기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원할 때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얼마나 섬세한 비밀의 언어인가! (…) 그것은 죄악이었다. 간통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런 죄를 짓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두 번째 여자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 그것은 죄를 저질러서 생기는 죄책감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난 그런 죄책감이었다. 신학에서 원죄라고 일컫는 것이 어쩌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사실 삶 자체에는 죄악 비슷한 것이 길들여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르치스처럼 너무나 순수하고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어째서 마치 죄인처럼 참회를 해야 한단 말인가?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53~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