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어머니란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될 어떤 존재였으며, 사람들이 창피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원래 무희였다. 어머니가 태어난 집안은 비록 지체가 높기는 했지만 상서롭지 못하게도 이교도 집안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그녀를 가난과 수모의 구렁에서 구해주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이교도라는 것을 몰랐기에 세례와 더불어 신앙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를 조신한 아낙네로 만들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은 얌전하게 절도 있는 생활을 했지만 그녀는 다시 예전에 춤추던 시절의 기질이 되살아나서 아버지의 근심을 사고 남자들을 유혹했다는 것이었다. 몇 날 몇 주씩 집을 비우기도 햇고, 마녀라는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남편이 몇 차례나 다시 데려와서 곁에 붙들어두었지만 결국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 그렇지만 골드문트는 그런 이야기를 의식 한켠으로 밀쳐내고 거의 잊어버리도록 교육을 받아왔었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91~92쪽.
융은 상담치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모든 환자에게 적합한 절대적인 이론은 없다는 것, 나아가 환자를 ‘도움이 필요한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실망한다고 한다. 자신을 ‘아픈 사람’으로 대하기보다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하는 융에게. 하지만 융은 환자를 침대에 누워 의사의 처치만을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대상으로 보는 것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 그래도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환자들에게, 병은 삶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훌륭한 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환자를 최대한 정상적인 인격체로 대우하고, 그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치유의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나아가 어떤 첨단의학보다도, 화려한 상담치료보다도,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환자 스스로의 ‘체험’임을 일깨운다. 환자가 지금 스스로에게 가장 절실한 체험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골드문트에게 바로 그 ‘체험의 멘토’ 역할을 해준 것은 바로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 나르치스였다.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마음을 구제하는 체험을 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와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고, 아직 ‘사제복’을 입은 상태도 아니었지만, 골드문트에게 절실한 체험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좀 더 강력한 처방으로 골드문트의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거침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날린다. 가혹한 어투로, ‘너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자 올바른 길이라 믿는 골드문트에게, 너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복음이 아니라 바깥 세상의 체험이라고 설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약한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날리는 예리한 충고에 상처를 받고 정신착란을 느끼며 쓰러져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그 아픈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의 상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존재’를 향한 아버지의 억압이었다. 무희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독선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의 성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고, 골드문트의 가슴 속에는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억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쾌락을 철저히 금지시키는 금욕의 수행공동체로 아들을 밀어넣은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자유로운 방랑의 길’을 선택하고 가족을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나르치스의 뼈아픈 충고 이후 골드문트는 기절해 쓰러져 오래 앓을 정도로 고통을 겪지만, 자신의 ‘운명의 부름’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만이 자신의 진정한 목표가 아님을, 그것은 아버지가 주입한 외부의 사명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에게 억압되어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금지되어 있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일깨워준 것도 나르치스였다. 그 고통스러운 체험이야말로 어떤 책의 금과옥조보다도 어떤 스승의 위대한 가르침보다도 골드문트에게는 결정적인 치유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나르치스는 얼마 전에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제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나르치스의 신호나 경고를 시건방지게 잘난 척 하는 성가신 행동이라고 곧잘 거부감을 느껴오던 골드문트도 지난 번의 커다란 체험 이후로는 이 친구의 지혜로움에 경탄해마지않는 존경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던가! 자기 인생의 비밀을, 숨겨져 있던 상처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아맞혔던가! 그리고 얼마나 지혜롭게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가!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