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소년은 희랍어를 유려하게 구사했고 의젓한 행동거지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답게 눈매가 차분하고도 형형했으며, 갸름한 입술은 단아하고도 엄한 인상을 주었다. 학자들이 그를 특히 좋아한 것은 놀라운 희랍어 실력 때문이다. 그리고 고결하고 섬세한 성품으로 그는 거의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으며, 상당수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차분하고 자제심이 강한 데다 너무 정중한 태도로 인하여 더러는 나르치스를 좋지 않게 여기는 축도 있었다. (…) 나르치스의 유일한 결점은 오만함이라 할 수 있는데, 나르치스는 자신의 그러한 결함을 놀랄 만큼 잘 감출 줄 알았다. 나르치스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에겐 그 어떤 싫은 소리도 할 수 없었고,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렇지만 학자들 말고 진정으로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기에 그의 우월함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에는 왠지 냉기가 감돌았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3~14쪽.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말한다. “내 모든 경험상 사랑은 거의 다 올라갔다고 생각했을 때 더 높이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사랑은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다’라는 인간의 명석한 판단을 보기 좋게 조롱한다. 사랑의 대상을 ‘이제 거의 이해했다’ 싶을 때. 상대방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마치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야’라고 속삭이듯. 타인을 향한 닿을 수 없는 사랑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융은 ‘마음의 병’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신신경증이란 궁극적으로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영혼의 고통이라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의미로 인해 고통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면, 아픔은 제 갈 길을 찾게 마련이다. 고통 받는 영혼은 방황하게 되어 있다. 방황은 우리 영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어놓을 때도 많다. 방황에 대한 본능적 공포는 시간을 마치 돈처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근대적 시간관념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나 모든 방황의 고통이 영혼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황도 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바로 평생을 방황으로 일관한 한 청년과 그 방황을 말없이 지켜봐 준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다.
로드무비는 보통 친구 두세 명이 ‘함께 떠나야’ 이루어지는 장르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야말로 진정한 ‘마음의 로드무비’처럼 느껴진다. 한 사람은 평생 수도원에 ‘은둔’하고, 한 사람은 평생 수도원 바깥을 떠돌며 유랑하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항상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함께 떠나지 않아도 늘 함께 여행하는 듯한 영혼의 동반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이니까.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나온다. “아무도 신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신은 우리들 속에 있느니라.”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골드문트, 차분하며 이지적인 나르치스. 정반대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은 평생 신의 메시지를 찾아 헤매지만, 각각 신을 찾는 방식이 다르다. 나르치스는 평생 학문에 매진하며 수도원 안에서 신의 사랑을 찾고, 골드문트는 평생 세상 곳곳을 떠돌며 신의 사랑을 찾아 떠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그토록 절실하게 찾았던 신은 수도원 안이나 바깥 같은 구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성경이나 성화같은 종교적 상징 속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 안에 있었다.
나르치스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처음부터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수도원장이 지나치게 공부에만 집중하고 친구를 사귀지 않는 나르치스를 걱정하자, 나르치스는 자기 운명의 갈 길을 이미 알고 있음을 고백한다. 수도원장의 운명과 심리까지 속속들이 분석해내는 나르치스의 날카로운 ‘심안’에 수도원장은 기가 질려버린다. 수도원의 최고 수장인 수도원장조차도 어린 나르치스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마음의 체급’이 같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나르치스는 진정한 친구 사귀기를 미뤄야 했다. 나르치스의 영혼의 오디세이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시점. 그것은 금빛 속눈썹을 반짝이며 스쳐 지나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강력한 호기심을 보이는 아름다운 소년, 골드문트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나르치스가 천천히 말했다.
“저에겐 사람들의 성격과 운명을 알아보는 그 어떤 감각이 있습니다. 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운명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소양입니다. 이러한 소양으로 인해 저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수도원 생활이 저의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면 저는 재판관이나 정치가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