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가슴 설레게 변했다. 하늘이 그토록 높고 아름다우며 그리움에 사무치도록 파란 적이 없었다. 강의 수면이 그토록 깨끗하고 청록색으로 밝게 빛났던 적도 없었으며, 방죽에서 물이 그토록 눈부시게 하얀 거품을 내면서 쏴쏴 흐른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멋진 그림처럼 새로 채색되어, 맑고 산뜻한 유리창 뒤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큰 축제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 서로 모순되는 그 느낌들이 신비로운 샘물이 되어 솟구치며 부풀어올랐다. 그의 내면에서 뭔가 아주 강력한 것이 속박을 끊고 자유롭게 숨쉬려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흐느낌 같기도 했고, 노래 같기도 했으며, 고함소리나 커다란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73쪽.
시작되자마자 끝나버린 안타까운 사랑의 기억을 안고, 차마 ‘추억’조차 되지 못한 아픈 시간의 흔적을 품고, 한스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아버지는 아직 신경쇠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한스를 또 한 번 다그친다. “한스, 기계공이 되고 싶니, 아니면 서기가 더 되고 싶니?”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라는 것이지만 사실 두 가지 다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을 벗어난 삶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어린 시절 그의 선택지도 이런 식이었다. ‘신학생이 되는 길’ 아니면 ‘평범한 인간이 되는 길’. 이제 그는 심지어 ‘평범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두 개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기계공 아니면 서기. 한스는 아버지를 뛰어넘을 강인함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의 선택’이라는 견고한 매트릭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융은 ‘개성화’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관계 맺음Bezogenheit’ 없는 개성화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성화의 필수요건이다. 한스는 하일너를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했으나 아직 남과 나눌 수 있는 자기만의 삶의 내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삶의 운전대를 놓아버린 채 하일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하일너가 없어지자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는 또 한 번 기회를 맞는데, 그것은 에마와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에서도 그는 ‘관계맺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에마가 유혹하는 대로 덧없이 끌려 다니다가, 에마가 떠나버리자 아무런 적극적인 노력도 해보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나버렸다’고 탓하기만 한다. 스승이 이끄는 대로,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친구가 이끄는 대로, 여인이 이끄는 대로. 한스는 그렇게 평생 남에게 이끌려 다니다가 ‘나의 삶’을 개성화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닐까.
한스의 주변 사람들은 한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 한스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명예에 집착했다. 그들은 한스가 신학자로 성공해서 자신들의 위신을 드높이길 기대했던 것이다. 한스의 여위어가는 몸과 시들어가는 영혼을 걱정해주지 않고, 더욱 스파르타식으로 한스를 몰아치기만 했던 교장과 목사. 그들은 한스가 죽은 후에도 한스의 존재 자체를 기리거나 그리워하기보다 ‘아까운 인재’라는 식의 계산적인 판단밖에는 내리지 못한다. 기계견습공으로 지내던 한스는 동료들의 강권 속에서 처음으로 만취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행방불명되고 만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슬픔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안타까움을,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첫사랑을, 모든 것을 주었지만 허무하게 끝나버린 뜨거운 우정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무의식이 막 개화를 시작하는 순간, 무의식의 자기실현이 막 꽃을 피우려던 순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아름다운 꽃봉오리인 채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한스에게는 무의식의 그림자를 의식의 햇빛에 비추어볼 줄 아는 지혜가 부족했다. 세상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나는 특별하다’는 오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스의 의식을 지배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면의 성장을 방해한다. 한스는 하일너와 엠마를 잃어버리면서 지금까지 간신히 단속해왔던 자신의 내면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경험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분열의 고통은 이후의 내면 통합을 향한 장대한 여정에서 필수적인 통과의례다. 언젠가는 이 시기가 지나고 더 멋진 자아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혹은 한스 자신이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는 차가운 강물 위의 시체로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영원히 끝나버린 것만 같았던 안타까운 한스의 여정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었다. 마치 한스가 너무 깊은 슬픔에 빠져 미처 겪어내지 못할 ‘개성화’의 가정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바톤을 이어받아 대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가 그토록 혼을 내려고 별렀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커먼 강물을 따라 조용히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도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그를 떠났다. (…) 시커먼 강물이 그의 손과 머리카락과 창백한 입술을 어루만지며 장난쳤다. 날이 밝기 전에 사냥을 하러 나온 겁 많은 수달이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미끄러지듯 그 곁을 스쳐지나갔을 뿐,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길을 잃고 헤매다 가파른 곳에서 미끄러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물을 마시려다가 삐끗 균형을 잃었을 수도 있다. 혹은 아름다운 강물에 홀려 몸을 숙였다가 평화와 깊은 안식이 가득 깃든 밤과 창백한 달을 보고, 피로와 두려움의 조용한 강요에 떠밀려 죽음의 그늘에 빠졌을 수도 있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213~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