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은 지금까지 놓쳤던 모든 것을 보상해주는 보물 같았다. 그 보물은 의무를 따르는 예전의 무미건조한 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뜨거운 삶이었다. 그는 마치 사랑에 빠진 젊은이 같았다. 위대한 영웅적 활동은 할 수 있지만 일상의 지루하고 자잘한 일은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20쪽.
융은 무의식의 잠재적 폭발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의식에 들어 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우리의 의식이 통제를 소홀히 하자마자 유약하고 열등한 인간이 표면에 드러난다고. 평소에는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불쾌한 책임과 의무를, 극히 피곤하거나 슬픔에 빠졌을 때는 곧잘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고통이라도 인간의 통제력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참고 견뎌왔던 것, 간신히 억압해왔던 모든 것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으로 표현되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증은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이 의식에게 ‘말’을 걸게 만드는, 무의식의 메신저다. 무의식이 매일 ‘꿈’이라는 메신저를 통해 의식의 문에 노크를 해도 말을 듣지 않자, 더 강력한 메신저를 보내는 것이다. 신경증은 ‘우리의 정신을 아프게 하는 것’으로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상처 입은 정신을 치유하기 위한 결정적인 힌트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신경증은 ‘고통’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지만, 그만큼 ‘구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일너는 마치 한스가 억압해 온 모든 꿈의 상징인 것 같았다. 공부에만 몰두하여 공부 이외의 삶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과 귀를 닫아야 했던 한스. 그 모든 짓눌린 꿈과 감수성을, 한스는 하일너에게 투사한다. “우정은 지금까지 놓쳤던 모든 것을 보상해주는 보물 같았다”는 문장 속에는, 우정을 통해 지금까지 억압해 온 모든 욕망을 스스로 보상받으려 하는 한스의 의지가 꿈틀거린다. ‘의무’만을 따르는 따분한 삶이 아니라, 고결하고 뜨거운 삶, 위대한 영웅적 몸짓으로 비상하는 삶. 일상의 자잘한 사무 따위는 모두 벗어던지는 삶. 하지만 어린 한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 따분하고 권태로운 ‘일상’이야말로, 인간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기ㅗSelbst’를 구성하는 핵심 성분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재미없고, 깡그리 벗어던지고 싶더라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소중한 것이다. 일상이 없이는 축제도 없으며, 의식이 없이는 무의식도 없다. 한스는 그동안 꼭꼭 눌러오기만 했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거꾸로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의무와 책임을 깡그리 던져버리고 만다. 하일너와의 멋들어진 ‘우정’에 비하면, 공부나 학교나 선생님이나 급우들, 신학생으로서의 의무 따위는 모두 하찮아 보였던 것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하일너와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누지 못했고, 공부말고도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한스. 이제는 반대로 우정에만 집중하게 된 한스는 다른 아이들과도 말을 하지 않게 되고 오직 하일너에게만 집착하게 된다. 수업을 비롯한 모든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직 하일너의 목소리만이 의미있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선생님은 한스에게 묻는다. 수업 시간에 멍하니 백일몽에 빠져 있느라 어떤 수업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교장은 의사를 불러 한스를 진찰한다. 하지만 ‘명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교장은 하일너와의 산책을 엄중하게 금지한다. 하일너와 함께 할 수 없을 때는 그것이 ‘죄책감’의 형태로 그를 괴롭혔으나, 이제 하일너와 함께 하자 ‘두통’과 ‘신경쇠약’이 그를 괴롭힌다. 의식의 ‘빛’에만 집착해도, 무의식의 ‘그림자’에만 집착해도 문제는 생긴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한스는 다시 한번 공동침실로 불려나갔다. 교장이 동네의사와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스는 진찰을 받고 오만가지 질문을 받았다.
(…) “신경에 아주 살짝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일시적인 신경쇠약이지요. 가벼운 현기증 같은 거예요. 이 젊은이는 매일 바람을 쐬어야 합니다. 두통이 낫도록 약물을 몇 가지 처방해주겠습니다.”
- 헤르만 헤세, 한미희 옮김, <수레바퀴 밑에서>, 문학동네, 2013,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