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차례로 늘어선 방 다섯 개에 선생들을 초청해 앉혀 놓고 이 방 저 방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모든 것을 동시에 배웠습니다.
이 진보! 이 지식의 빛이 사방으로부터 깨어나는 제 두뇌 속으로 속속 집결되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그것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전에도 물론 그러지 않았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한 번도 없었던 모진 노력으로 저는 드디어 유럽인의 평균교양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우리 밖으로 나오는 데 도움되었고, 저에게 이 특별한 출구, 인간 출구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는 그래도 의미가 있습니다. "슬그머니 달아나다“라는 멋진 표현이 독일어에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슬그머니 달아난 겁니다. 자유란 언제나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는 저에게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 프란츠 카프카, 송소민 옮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카프카 단편선》, 책만드는 집, 2008, 155쪽
로빈슨 크루소는 왜 프라이데이를 처음부터 자신의 ‘노예’로 만들려고 했을까. 왜 자신은 주인이고 프라이데이는 노예가 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프라이데이와 자신 사이에 동등한 우정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걸까.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는 ‘식민지: 피식민지= 백인: 유색인’의 공식이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주민보다 우월하고 강력함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안에 시달릴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를 완전히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일까. <로빈슨 크루소>는 철저히 백인 식민주의자의 눈으로 그려진 이야기이기에 어차피 우리는 프라이데이의 ‘내면’을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를 프라이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도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꽤 닮은꼴이 되지 않았을까.
카프카의 원숭이와 다니엘 디포의 프라이데이는 현대인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나를 길들이려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의 ‘이성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 내면의 그림자를 지닌 존재라고. 원숭이는 고매하신 학술원 회원들에게 보고한다. 자신은 ‘유럽인의 평균적 교양수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원숭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인간세계에 ‘동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동화되었다는 주장 자체가 미심쩍다. 그는 ‘인간과 비슷해졌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인간과 비슷해져 보니 별거 아니더라’라는 주장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출구를 얻기 위해 인간 흉내를 내었을 뿐이고, 인간을 닮고 싶어서, 인간처럼 대단해지고 싶어서 인간 흉내를 낸 것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힘겹게 모방하려 한 ‘인간의 습성’과 ‘인간의 교양’은 원숭이의 눈으로 볼 때 전혀 본받을 만한 귀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한 기념비적인 원숭이’ 대접을 받으며 편안하게 인간 고객들을 대접한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탁자 위에 와인 병을 올려놓고, 흔들의자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는 매니저까지 부리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에게 시키기도 한다. 저녁에는 거의 매일 공연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는 최고의 스타가 된다. ‘인간을 닮은 원숭이의 퍼포먼스’는 인간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상시적인 엔터테인먼트가 된다. 그에게는 애인도 있다. 그가 각종 파티나 모임에 참석한 후 숙소에 돌아오면, ‘훈련 중’인 암침팬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 원숭이 커플은 ‘원숭이의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는 인간을 흉내 내는 모든 몸짓에 익숙하지만, 사랑만은 ‘원숭이처럼’ 하고 싶은 것 같다. 이 자유만은 아직까지 빼앗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 ‘원숭이식 사랑’은 그의 작고 소중한 출구일 것이다. 그러나 암컷 침팬지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그녀에게는 ‘아직 원숭이었던 자신’의 옛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원숭이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인간이면서 원숭이이기도 하다. 그의 가장 소중한 부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히 길들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존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제가 학술모임이나 연회 등 여러 즐거운 모임에서 밤늦게 돌아오면, 훈련 중인 작은 암침팬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와 암침팬지는 원숭이의 방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낮에는 그 암침팬지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동자에는 훈련받고 있는 동물에게서 보이는 정신착란의 혼란스러운 빛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만이 알아볼 수 있는데, 저는 그 눈빛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쨌든 저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노력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저는 인간들의 판단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지식을 넓히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보고를 할 뿐입니다. 학술원의 높으신 여러분들께도 단지 보고를 드렸을 뿐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 송소민 옮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카프카 단편선》, 책만드는 집, 2008,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