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가 도둑질을 했다구요? 이 애가? 이 애는 당신들이 필요하다면 입고 있는 단벌마저 벗어줄 만큼 착한 아이랍니다. 이 애는 그런 앱니다! 이 애가 황색감찰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를 위해서 몸을 판 것입니다. 아아! 돌아가신 당신, 여보! 여보, 당신은 보셨어요? 이것이 당신의 추도식이랍니다. 아아, 하느님! 자, 이 애를 보호해주십시오. (…) 가엾은 폐병쟁이인 의지할 데 없는 이바노브나의 슬픔은 아마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이 고통에 일그러진, 메마른 폐병화자의 얼굴, 이 마를 대로 말라 피가 달라붙은 입술, 이 목쉰 부르짖음, 하느님의 도움을 애원하는, 어린애처럼 의심할 줄 모르는 절망적인 기도, 그것은 너무나 참혹하고 비통했으며, 누구나가 이 가엾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532쪽.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모욕을 당한 후 두냐와의 혼사를 망친 루진은 소냐를 이용해 라스콜리니코프를 망신 주기로 작정한다. 소냐 부친의 추도식에서, 루진은 소냐가 자신의 돈 100루블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알고 보니 소냐에게 선심 쓰듯 10루블을 주면서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는 다른 한쪽 손으로 그녀의 호주머니에다 슬쩍 100루블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소냐는 망연자실하고, 소냐의 양어머니인 이바노브나는 추도식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소냐의 무죄를 필사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루진의 범행의도를 낱낱이 파헤친다. 루진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가족을 도와준 것을 알고 있었고, 마치 라스콜리니포크와 소냐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떠벌였던 것이다. 물론 라스콜리니코프와 어머니, 두냐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한 루진의 흉계였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창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식의 암시를 잔뜩 풍기면서. 분노한 라스콜리니코프는 “루진,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장점을 한데 모아도 소냐의 새끼손가락만한 가치도 없다.”고 말해주었고, 루진은 이에 앙심을 품고 소냐를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이었다.
소냐를 괴롭힘으로써 라스콜리니코프를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키면, 두냐를 다시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루진.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치 훌륭한 변호사처럼 소냐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루진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소냐의 명예와 행복은 나에게 있어 지극히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이 사내(루진)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라스콜리니코프는 매우 치밀한 논리적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소냐와 자신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다. 소냐의 명예와 행복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도 소중한 것임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광기도 불안도 죄책감도 잊은 채, 전혀 살인자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존엄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소냐라는 타인을 아무 이유 없이 순수하게 돕고 싶은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장발장은 혁명의 피바람이 가득한 거리 한복판에서 자베르를 발견한다. 감옥을 나와서도 자신을 끝내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 살아있는 법률, 걸어다니는 법전. 그것이 바로 자베르였다. 자베르가 살아있는 한 장발장은 어디서든 죄인이고 어디서든 무기징역수였다. 그러나 장발장은 자베르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아준다. 자베르가 혁명군의 스파이 노릇을 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베르를 즉결처분하려 했던 것이다. 장발장은 자신이 자베르를 ‘처분’하겠다고 말하고는, 몰래 자베르를 놓아준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었다. 장발장은 이제 ‘잡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죄수’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베르는 당혹스럽다. 자베르의 가장 큰 고통은 그의 평생을 지탱해 온 빛나는 확신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법에 대한 확신, 자신의 흠결 없는 인생에 대한 확신, ‘범죄자는 반드시 제도에 입각하여 처분해야 한다’는 확신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가 그토록 신봉하던 법전은 이제 아무 의미 없는 나무토막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도망치는 장발장을 보며, 그는 또 한 번 고뇌한다. 장발장을 놓아주는 자베르라니. 그건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베르에게 이상이란, 인간답게 되는 것도, 위대해지는 것도, 숭고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결점도 없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었다.” 자베르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자선을 베푸는 악인, 동정심 많고, 다정하며, 남 돕기를 좋아하고, 마음이 관대하며, 악에 대해서는 선으로 보답하고, 증오에 대해서는 용서로 보답하고, 복수보다는 연민을 느끼고, 적을 멸망케 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멸망하는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때린 자를 구하고, 높은 덕 위에서 무릎을 꿇고, 인간보다 천사에 가까운 징역수!”
장 발장은 자베르를 용서했다. 그 사실에 자베르는 몹시 당황했고, 또한 그 자신이 장발장을 용서한 것에 스스로 망연자실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장발장을 넘겨줄 것인가? 그것은 나쁜 일이었다. 그러면 장발장을 자유롭게 놓아 둘 것인가? 그것도 나쁜 일이었다. 첫 번째 경우는 관리가 유형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유형수가 법률보다 높이 올라가서 법률을 밟는 결과였다. 어느 쪽도 자베르에게는 불명예였다. 어느 쪽으로 마음을 정해도 그곳엔 추락이 있었다. (…) 신성한 징역수! 단죄할 수 없는 죄수! 자베르에게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 자베르에 대한 장발장의 관용은 그를 압도하고 말았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743~17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