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갑시다!” 하고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틀림없이 당신 댁에 들르겠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한데 당신의 주소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조급한 듯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소냐는 자기 주소를 적어주고나자 갑작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 라스콜리니코프는 아까부터 그녀의 부드럽고 밝은 눈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렇게 쉽게 되질 않았다. (…) 일찍이 소냐가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전혀 새로운 하나의 세계가 언제부터인지 어렴풋한 형태로 그녀의 마음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오늘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녀가 있는 곳엘 들르고 싶다고 한 말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오전 중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바로일지도 모른다.
‘오늘만은 그만둬 줬으면, 제발 오늘만은!’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320~321쪽.
라스콜리니코프가 두냐와 어머니의 방문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초라한 방으로 들어온다. 소냐는 아버지의 장례식 비용을 대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러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끔찍한 가난을 목격하고 기가 질려버리고 만다. 곤경에 처한 자신의 가족을 도와준 사람의 형편이 그토록 어려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도 나처럼, 가난하고 쓸쓸하고 비참한 사람이었다니. 소냐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한편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속에서도 전에 없던 동요가 일어난다. 그는 소냐에게서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낀다.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맑고 밝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을 더 깊이,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 그러나 그는 소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 감정은 아마도 공포일 것이다. 그녀의 티 없는 눈동자 속에서, 죄책감으로 비참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까봐.
한편,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코제뜨는 젊은 혁명가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를 읽고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숨어 살아야만 하는 장발장 때문에 코제뜨는 자신이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알지만, 점점 마리우스에게 깊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장발장은 코제뜨에게 온몸으로 ‘보호막’이 되어주고자 했다. 세상의 어떤 어둠도 코제뜨의 가슴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느 날 우연히 감옥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죄수들의 행렬을 발견하고 장발장은 돌처럼 굳어버린다. 기필코 잊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무방비상태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코제뜨는 처음 보는 죄수들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고, 세상에 저토록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장발장은 차마 말하지 못한다. 자신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그 무서운 세상을 목숨 걸고 도망쳐 나와, 지금 이렇게 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장발장이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장발장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코제뜨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어둠을 그녀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발장은 코제뜨의 가슴 속으로 문을 두드리는 눈부신 ‘빛’까지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단단하게 가로막아도 반드시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사랑의 빛이었다. 장발장이 필사적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가로막아도, 마리우스는 빗물이 되어 아름다운 다나에의 침실에 스며든 제우스처럼 코제뜨의 가슴 속에 끝내 스며들어온다. 마리우스의 편지는 가슴 시린 사랑의 단상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를 단 한 사람으로 환원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까지 확대시키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시작해 놓은 일은 신만이 완성시킨다.” “그대가 별을 올려다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것이 빛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옆에는 그보다 훨씬 부드러운 광채, 훨씬 신비한 존재가 있다. 그것은 여성이다.” 코제뜨는 이 격렬한 사랑의 문장들을 품에 안은 채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의 광채를 느낀다. 그리고 마리우스가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코제뜨는 지금까지 이런 걸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 수수께끼 같은 글들은 어느 것이나 찬란하게 보였고 마음을 이상한 광채로 휩쌌다. 그녀가 지금까지 받은 교육은 마치 불씨에 대해서는 가르치면서 불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처럼, 영혼에 관해서는 언제나 얘기했으나 사랑에 대해 얘기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 조용히 시들어가는 한 남자가, 금방 죽음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운명의 비밀을, 인생의 열쇠를, 사랑을 써보낸 것이었다. 그것은 한쪽 발을 무덤 속에 넣고 손가락을 하늘에 놓고 쓴 것이다. (…) 그 수첩은 말하자면 마리우스의 영혼이 코제뜨의 영혼에 뿌린 하나의 불똥 같은 것이었다.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250~1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