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로쟈와 사귄 지가 1년 반이나 됩니다만, 침울하고 까다롭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하지요. 요즘 와서는-어쩌면 훨씬 전부터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회의하는 게 많아진 데다가 우울증의 증세마저 보입니다. 매사에 너그럽고 마음씨 좋은 녀석인데 자기 감정을 남에게 얘기하기 싫어하여 말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보다 차라리 인정머리 없는 행동으로 뜻을 드러낼지 모르는 그런 성격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울증이 아니라, 쌀쌀하기만 하고 인간다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해질 때도 있답니다. 마침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것 같죠. 이따금 무서울 정도로 말이 없을 때도 있고요. 언제나 시간이 없다느니 방해하지 말라느니 하고 입버릇처럼 지껄이면서 요즘은 뒹굴기만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거든요. 비꼬는 것은 아닙니다만 기지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부질없는 것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태도랍니다. 남의 말은 반밖에 듣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남이 관심을 갖는 일은 외면해버립니다. 자기를 무척 과대평가하고 있지만 그럴 권리가 아주 없지도 않은 듯합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유성인 옮김, <죄와 벌>, 하서, 2007, 283쪽.
누구도 의심할 것 같지 않은 순진하고 연약한 청년이 어떻게 살인자가 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던 한 청년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어떤 특별한 살인의 인자가 특정한 사람에게만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죄의 욕망’이 탄생하는 지점을 심도 깊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은 그의 가족들이 볼 수 없는 로쟈의 진면목을 알고 있다. 위 대목은 라주미힌이 로쟈의 어머니에게 그의 근황을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관심이 없으며, 세상을 향한 마음의 창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듯한 로쟈. 라주미힌이 묘사한 로쟈는 거의 자폐증, 우울증, 정신분열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심각한 환자 그 자체다.
21세기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로쟈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그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쟈를 ‘법의 그물망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신출귀몰한 사이코패스’로 그린다면 그것은 <죄와 벌>을 가장 잘못 해석하는 일일 것이다. 로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로쟈는 우리들 중에서도 유난히 예민하고 섬세한 영혼을 지녔을 뿐이다. 로쟈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한 사람에게 압축시키고는 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르고, 그 끔찍한 죄를 스스로 봉인하려 했다. 로쟈는 어떻게든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치려 하다가, 문득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타인의 얼굴’을 목격하고 만다. 그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가장 아름다운 가치들을 여전히 부여안고 살아가는 두 여자. 그가 살기 위해 내팽개친 선량함과 자비심을 여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두 여자. 두냐와 어머니. 그녀들을 통해, 로쟈는 ‘나의 죄를 가장 투명하게 비춰주는 타인의 얼굴’을 본 것이다.
한편 장발장에게는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19년 동안 죄수였던 구제불능의 장발장은 한 도시의 시장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가가 되었고, 팡틴느라는 이름의 창녀를 구해주고 그녀의 아픔과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이 새롭게 담금질 되는 것을 느낀다. 팡틴느의 딸 꼬제뜨를 아동학대의 지옥으로부터 구해주면서, 장발장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제 팡틴느의 딸은 장발장의 딸이 되어,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그러나 코제뜨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자라난다. 장발장은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자베르 경관의 추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죄로부터, 코제뜨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1830년 7월 혁명 이후 프랑스사의 격동 한가운데서 혁명을 꿈꾸는 청년 마리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코제뜨.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숙녀 코제뜨는 장발장에게 이제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사실 장 발장은 수도원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오히려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꼬제뜨를 매일 볼 수 있었고 차츰 부성애가 싹터 자라감에 따라 강한 애정을 느꼈다. 이 아이는 내 아이다, 이 애만은 내게서 뺏어가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계속되리라.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여기서 매일 조용히 교육을 받고 마침내 훌륭한 수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수도원만이 그애에게나 내게 유일한 세계이고, 나는 여기서 나이가 들고 그 애는 조금씩 자라리라. 이 아이는 여기서 나이를 먹고 나는 여기서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 황홀한 희망.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문득 그는 곤혹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 행복은 분명 내 것일까. 사실은 남의 행복, 이 애의 행복을 나 같은 늙은이가 가로채 내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것이 아닐까. 그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것은 도둑질이 아닐까?
- 빅토르 위고, 송면 옮김, <레 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12, 1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