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엎드려 있는 일은 이미 밤 시간 동안에도 견뎌내기 어려웠고, 먹는 일도 얼마 안 있어 금방 싫증이 나 아무런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심심풀이로 벽과 천장을 사방으로 기어 다니는 습관을 얻게 되었다. 그는 특히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이 좋았다. 방바닥 위에 엎드려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숨쉬기가 훨씬 자유로웠고 가벼운 떨림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때로는 그 위에 매달려 거의 행복감에 가까운 방심상태에 빠져 있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발을 떼는 바람에 방바닥 위로 털썩 떨어져 그 자신도 깜짝 놀라는 일도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67~68쪽.
그레고르는 다시 인간이 되고 싶다는 희망보다는, 가족들이 자신의 변신한 모습을 아예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받는다. 또한 ‘이제 난 어떡하지?’하는 본능적인 걱정보다도 ‘가족들은 어떡하지?’라는 의무적인 걱정으로 고통 받는다. 그는 벌레가 되어서도 일과 돈과 가족을 향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의 육체는 그의 정신을 배반한다. 정신적으로는 늘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의 육체는 점점 벌레의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와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기에, 너무도 심심해진 그레고르. 그는 마침내 벽과 천장을 사방으로 기어 다니는 ‘벌레의 행동’을 시작하고 금세 그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벌레처럼 상한 음식을 좋아하게 되고, 벌레처럼 끈끈한 액체를 벽에다 남기면서, 그는 점점 겉모습을 넘어 그 속성까지 벌레의 삶에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가족들은 벌레가 된 그를 사실상 인간 세상과 격리시킴으로써,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레고르를 단죄해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평범한 직장인에서 처치곤란의 살인범이 되어버린 뫼르소.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감형을 받으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죄에 대한 어떤 인과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는다. 이 모든 행동이 예심판사를 비롯한 법조인들, 언론사 기자들, 증인들, 주변 사람들까지도 경악하게 만든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법조인들도, 뫼르소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논의의 초점을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평소 ‘용의자의 개인 신상’에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람의 살인보다 이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상태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예심판사는 마치 뫼르소가 살인을 한 것보다 그가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뉘우치지 않는 것을 더 나쁜 일로 취급하는 것 같다. 그의 살인동기를 물어볼 때는 차분하기 그지없던 예심판사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뫼르소의 반응에는 노발대발하는 것이다. 예심판사는 뫼르소의 지나친 솔직함에 당황한다. ‘당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고 있냐’는 질문에, 뫼르소는 이렇게 대답한다. 뉘우치기보다는, 이 모든 상황이 ‘차라리 좀 귀찮다’고. 그는 형량을 감량받기 위한 그 어떤 방어기제도 동원하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을 무서우리만치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의 ‘추가죄’였던 것이다. 예심판사는 그동안의 풍부한 경험을 활용해 죄수들의 공포심과 인간적인 나약함에 호소하려 한다. 너는 지금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나의 신앙을 너에게 전파할 때다. 약해빠진 네가, 우리의 위대한 신을 믿지 않고 배길 수 있겠나? 예심판사의 속셈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신을 믿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것처럼, 죄수 또한 신을 믿음으로써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강자들의 특징은 바로 이럴 때 드러난다. 자신의 신념체계 속으로 약자를 너무 쉽게 복속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뫼르소가 너무도 태연하게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예심판사는 당황하여 외친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이러한 협박도 통하지 않자, 급기야 그는 반말로 뫼르소에게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뫼르소에게는 이 모든 협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뫼르소는 진정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결코 신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심판사는 물론 신부님까지도 당혹스럽게 만드는, 무서운 ‘죄악’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서더니 나더러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를 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주저앉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벌써 책상 너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나의 눈앞에다 내밀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 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가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79~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