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그레고르의 유일한 관심사는, 온 가족을 완전한 절망 속에 빠뜨린 그 불행을 식구들이 가능한 한 빨리 잊어버릴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동료들보다 몇 배의 열성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여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말단 직원에서 출장영업사원으로 승진했다. 출장 영업사원에게는 물론 전혀 다른 돈벌이의 수단이 주어졌는데,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즉시 커미션의 형태로 현금이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그 돈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식구들은 모두 행복해서 입이 벌어졌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나중에 그레고르는 온 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실제로도 그렇게 했다-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후로 그런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눈부신 모습으로는. 식구들이나 그레고르나 다들 익숙해져서 이젠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식구들은 그레고르가 벌어다준 돈을 감사하게 받았고 그는 그 돈을 기꺼이 내어놓았지만 애틋한 정 같은 것은 이제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오로지 여동생만이 그래도 그레고르와 가깝게 지냈다.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56쪽.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경제적 위기로 온 집안이 위험에 빠졌을 때, 식구들 모두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주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매출 좋은 출장영업사원이 되었고, 번 돈을 모두 가족들을 돕는 데 쓰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도움이라는 것은 참 기이한 중독성이 있다. 처음 한두 번은 눈물겹게 고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도움이 물처럼 공기처럼 그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도움의 손길이 오다가, 몇 년이 지난 후 그 도움의 손길이 ‘뚝’ 끊기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우선 짜증부터 낼 것이다. 아니, 왜? 계속 주다가 왜 안 주는 거야?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왜 나에게 도움이 계속되지 않는가’부터 먼저 걱정하는 마음. 이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냉혹한 본성일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그레고르에 대한 ‘연민’보다 자기들의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레고르에 대한 걱정보다 그레고르에 대한 공포를 먼저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을 너무 솔직하게 그려낸 카프카의 정직성이 아닐까. 식구들에게 희망의 빛, 구원의 빛이었던 그레고르는 왜 하필 벌레가 되었을까. 어쩌면 이것은 적극적으로 외부상황에 대해 반항을 할 수 없는 그레고르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저항의 드라마가 아닐까.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반항은 개인을 고독에서부터 끌어낸다고. 반항은 모든 인간에게 최초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공통적인 태도라고. 그는 「 반항적 인간 」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야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 훨씬 멋지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표현이 능숙하지 못한 그레고르에게 유일한 감정 표현법은 바로 차라리 벌레라도 되어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알제라는 도시에서 선박중개인 사무소 직원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 뫼르소. 그는 작품 곳곳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 절대적으로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인의 저 첫 대목에서 뫼르소의 비범한 차이를 목격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죽었다는데, 그 날짜조차 제대로 모르고,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후에도, 충격이나 아픔을 표현하지 않은 채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취급하고, 오직 주말에 쉴 수 없는 것만 걱정하는 젊은이.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된다. 마리를 좋아하면서도 마리와의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또 누가 청혼해도 상관없이 결혼하겠다는 식. 그는 ‘의미’를 만들어가다가도 의미가 생성되는 순간 의미를 ‘해체’시켜버리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 사람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뫼르소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에게 그것은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을까. 내 능력이 안 되면서도 단지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기 때문에 꾸역꾸역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든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반드시 통곡을 하고 밤을 새고 슬픔에 온몸을 저당 잡혀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통념이자 갑갑한 규범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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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거의 수직으로 모래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바다 위에 반사되는 그 강렬한 섬광은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 땅에서 올라오는 돌의 열기 속에서는 숨조차 쉬기가 어려웠다. (…) 나는 맨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반쯤 졸고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바닷가 저 끝 아주 멀리서,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랍인들이 우리들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레몽을 쳐다보았더니 그는 “그놈이야.”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걸음을 계속했다. 마송은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올 수 있었을까 하고 물었다. (…) 아랍인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벌써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걷는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레몽은, “마송, 싸움이 붙으면 넌 둘째 녀석을 맡아. 내 상대는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뫼르소, 만약 또 다른 놈이 오면 그건 네가 맡아.”하고 말했다. 나는 “응.”하고 말했고, 마송은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지나칠 정도로 뜨겁게 단 모래가 지금 나에게는 붉게 보였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