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 부모를 생각해서 꾹 참아왔지만, 만일 참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작 사표를 냈을 거고 사장 앞으로 다가가 그의 면전에 대고 평소에 품고 있던 내 생각을 속 시원히 내뱉어 주었을 텐데. 그러면 사장은 틀림없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졌을 거야! 책상 위에 걸터앉아 위에서 내려다보며 직원과 이야기하는 사장의 버릇이라니. 참 별나기도 하지. (…) 그렇지만 아직 희망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야. 우리 부모가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만큼 내가 언제고 돈을 모으게 되면―그러려면 오륙 년은 더 걸릴 테지만―꼭 그렇게 해주고야 말겠어. 그렇게 되면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어나야 해. 다섯 시면 기차가 떠나니까.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변신』, 문학동네, 2005, 10쪽.
우리 몸이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일까. 위기의 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의 순위가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일단 변해버린 외모를 은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일단 절망의 탄식부터 시작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족들이 먼저 발견하여 기함을 할지도 모른다.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벌레가 되더라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나 ‘벌레인 채로도 계속할 수 있는 활동’을 생각해낼 것이다. 벌레인 채로 ‘손’이 아닌 수많은 ‘다리들’을 이용해 웹서핑을 하거나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벌레가 되었다’는 현실에 경악할 것이다. 벌레가 되었으니 도무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그레고르 잠자는 어쩐지 좀 다르다. 그는 벌레가 된 순간에도 ‘출근’을 걱정한다. 그는 오랜 영업사원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결근은 물론 지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에게 정시출근은 자긍심의 근원이자 지상 최대의 임무였으며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는 거대한 벌레의 몸을 지닌 채로 어떻게 해서든지 출근 기차를 타기 위해 몸부림친다.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레고르의 안위보다는 그레고르의 출근을 걱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고르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어떤 외부의 변수가 있어도, 지각 따윈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잠자 씨네 가족들은 모든 생계의 짐을 그레고르의 등 위에 얹어놓았다. 그레고르가 출근을 해야, 그들은 생활할 수 있고, 그레고르의 사장에게 진 아버지의 빚도 갚을 수 있다. 그레고르는 그동안 ‘아버지의 빚만 다 갚으면 자신의 삶은 바뀌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는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으면서도 아버지를 여전히 가장으로 모셨고,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벌레로의 변신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그레고르 잠자가 짊어진 운명의 굴레는 한 치도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그레고르 잠자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존재였다. 적어도 그는 겉보기에는 자유로워 보였다. 그는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 앞에서도 지나치게 자유로워 보인다.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나이조차 모르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겠냐는 요구도 거절한다. 시신 앞에서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맛있는 까페오레를 마시며,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혈육인 아들보다도 오히려 양로원의 친구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로원 원장은 마치 힐난하듯이, 뫼르소에게 말한다. “뫼르소 부인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에 이곳에 들어오셨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당신밖에 없는 처지였더군요.” 뫼르소는 남들 앞에서 효자로 보이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자신을 냉혹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싫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어머니를 부양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원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이어 나간다. “변명할 건 없어요. 나도 당신 어머니의 서류를 읽어보았는데, 어머님을 부양할 수가 없는 처지였더군요. 어머니한테는 돌봐줄 만한 사람이 따로 있어야 했는데, 당신의 월급은 얼마 안 됐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는 여기 계신 게 더 행복하셨습니다.” 뫼르소는 부정하지 않는다. 엄마와 함께 지냈을 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뫼르소는 죽은 자를 향한 의례적 슬픔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너의 슬픔을 증명하라’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입관을 했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나사못을 뽑아 드려야죠.” 그러면서 관으로 가까이 가려기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안 보시렵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그는 말을 뚝 끊었고, 나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구나 싶어서 난처해졌다. 조금 후 그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그러나 나무라는 어조는 아니었고, 그저 물어나 보자는 듯했다. 나는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흰 수염을 어루만져 비꼬면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하긴 그러실 겁니다.” (……) “혼자 계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 방안에는 저물어 가는 오후의 아름다운 빛이 가득했다. 무늬말벌 두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붕붕거리고 있었다. 나는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