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마지막회
사랑을 원치 않는 자의 사랑
이 그림들엔 이상하게도 그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방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293쪽.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도 기어코 사랑은 온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랑은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할 때가 있다. 지나친 에고 때문에, 자신을 향한 극대화된 사랑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감성의 회로가 고장 나버린 사람들. 스트릭랜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사랑 따위’ 무시하고 ‘여자 따위’도 폄하했지만, 사랑으로부터 예술의 에너지를 얻고 여성으로부터 잃어버린 모든 생을 찾는다. 스트릭랜드는 평생 세 여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행운아였는데, 그 여성은 하나같이 스트릭랜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런던에서는 아내의 사랑을, 파리에서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던 블란치의 사랑을, 마침내 타히티에서는 원주민 처녀의 사랑을 받게 된 스트릭랜드.
그를 사랑했던 첫 번째 여자, 아내의 사랑은 절대적이면서도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어느 한 쪽에게 배신당하면 지속될 수 없는 사랑, 결혼제도의 틀 안에서만 성공할 수 있는 사랑. 두 번째 여자 블란치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이긴 하지만 소유와 독점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사랑이었다. 세 번째 사랑, 이 순박한 원주민 처녀의 사랑이야말로 스트릭랜드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 대가도 보답도 바라지 않는 사랑. 이 사랑의 품에 안겨서야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는 항상 ‘사랑 따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사랑을 무시해 왔지만 결국 사랑이야말로 그를 구원한다. 그를 둘러싼 세 여자의 사랑뿐 아니라, 예술가의 재능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 아내와의 불륜까지 이해해주었던 화가 스트로브의 사랑, 그의 인생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그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젊은 작가의 사랑, 그가 나병에 걸려 그의 집이 완전히 격리되었을 때조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와 치료해주었던 의사의 사랑. 이토록 수많은 사랑의 네트워크 속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은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조건 없는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파리에서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으로 굶어 죽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죽음은 마침내 그가 원했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직후의 행복한 죽음이었다.
아셴바하에게도 사랑은 구원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베니스는 이미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무인도’다. 다른 이의 미심쩍은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그는 타치오를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곳만이 진정한 세상이라 느낀다. 그는 타치오의 동선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죽음의 공포마저 삼켜버린 에로스와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느낀다. 그에게 타치오는 살아 있는 에로스였고, 그가 창작할 수 없는 영원한 시였으며, 사랑하지만 가져서는 안 될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베니스에 몰아친 치명적인 전염병의 광풍. 그것은 그의 열정에 오히려 불을 붙인다. 그토록 붐비던 관광도시 베니스가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두 사람만 남긴 채 무인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베니스에 오직 소년과 자신만이 남는 것을 상상하며 아셴바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와중에도 소년에게 ‘사랑스럽게’ 보이기 위해 갖은 치장을 하며 그는 자신의 영혼이 해방됨을 느낀다.
자신이 콜레라에 감염된 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오직 타치오의 일거수일투족만을 집요하게 좇던 그는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시야에 아직 타치오가 보인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았을까. 그는 끔찍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존재,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도덕과 명예와 위엄을 목숨처럼 귀히 여겼던 아셴바하는 이제 그 모든 체면을 집어던지고 오직 말조차 걸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에 생을 걸게 된다. 생의 휴식을 찾으러 갔던 곳에서 오히려 그는 생의 클라이맥스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치열한 삶의 절정에서 비로소 지금까지 좀처럼 피워올리지 못했던 순수한 예술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그 시는 오직 그의 마음속에서만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었지만, 그 순간은 누가 뭐래도 진실이었다. 스트릭랜드와 아셴바하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랑에는 죽어도 빠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원치 않는 자의 사랑, 그 피날레는 바로 죽음보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의심을 받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또한 그들 역시 거의 달아나듯이 떠나버렸다. (…) 이 도시에서 외국인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실이 조금씩 누설되자 관계자들의 끈질긴 협잡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은 공포 분위기를 막을 수가 없었던 듯했다. (…) 타치오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소년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그 남자에게는 이따금씩, 마치 도망과 죽음이 모든 성가신 인간들을 주변에서 멀어지게 하여 오로지 자기만 아름다운 소년과 함께 이 섬에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정말이지 오전에 바닷가에서 그의 시선이 노골적이고도 무책임하게 곧바로 그 그리운 소년을 향해 고정되어 있을 때나, 해 질 녘에 구역질 나는 시체가 쉬쉬하는 가운데 운반되곤 하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체신 없이 소년의 뒤를 따라다닐 때면,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 그 엄청난 사건이 그에게는 뭔가 희망적인 듯이 생각되었고 도덕의 법칙이라는 것도 금방 무너질 정도로 약한 듯이 여겨졌다.
-토마스 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5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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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