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7회
죽음보다 깊은 열정, 탐닉, 그리고 충동
이곳(타히티)이 바로 찰스 스트릭랜드가 오랜 방랑 끝에 이른 곳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그가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준 그림들을 그려낸 곳이었다. (…) 기교와 싸우느라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스트릭랜드로서는 마음의 눈이 본 비전을 표현하는 일이 다른 이들보다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히티에서는 사정이 그에게 유리했다. 그는 자신의 영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사방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후기 작품들은 적어도 그가 무엇을 찾아 헤맸던가를 암시해주고 있다. (…)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머무를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마침내 머나먼 이곳 이국땅에서 다시 육체의 옷을 걸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진부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는 여기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224~225쪽.
어느 곳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생각 때문에, ‘여기는 나를 나답게 해주지 못하는 곳이야’라는 판단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길을 떠난다. 그들은 생물학적 고향에서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자기만의 새로운 고향을 창조해야 한다고 느낀다. 태어난 고향이나 살아온 고장이 아니라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야’라고 느끼는 강력한 기시감을 전해주는 원초적 공간을 찾아 헤매는 여정. 그 헤맴의 과정이 곧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스트릭랜드는 평생 정착할 줄로만 살았던 영국을 떠나, 예술의 도시 파리를 거쳐, 마침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종착역, 타히티 섬에 다다른다. 그에게 가장 ‘나다운 어떤 것’을 끌어내 주는 원초적 노스탤지아의 공간, 그곳이 그에게는 타히티였다.
그곳에서 그는 걷는 모든 곳, 숨 쉬는 모든 공기,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는 듯한 환상적 체험을 한다. 그리고 사랑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그가,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다 퍼주고도 질식사하지 않을 수 있는 강인한 ‘임자’를 만난다. 그녀는 원주민 처녀 아타.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아내가 되어 평생 그의 곁에 있고자 한다. 스트릭랜드가 나병에 걸려 홀로 산으로 잠적하려 하자, 항상 스트릭랜드의 말에 따르던 그녀는 돌변하여 강하게 저항한다. 스트릭랜드에게 그녀는 곧 타히티였고, 그를 낳지 않은 어머니였으며, 그가 사랑하지 않아도 그에게 기꺼이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평생의 지기(知己)였다. 그리고 그녀의 보살핌 속에서 그는 마침내 필생의 역작을 그려낸다. 그의 병은 점점 깊어져 물감조차 사러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는 그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아셴바하 또한 베니스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사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베니스는 그의 인생 최악의 공간이었다. 여행객들을 구워삶는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게다가 당시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였다.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니스의 모습은 이 소설의 중심 테마가 아니다. 그는 그에게 살아 있는 뮤즈, 살아있는 예술, 살아 있는 이상향인, 타치오를 보느라 베니스의 아름다움도, 베니스의 협잡도, 베니스의 위험도 보지 못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콜레라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베니스를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전염병의 소식을 열심히 탐문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타치오가 있는 한 베니스를 떠날 수 없다’는 집착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합리적 이성은 그에게 가녀린 목소리로 속삭인다. 베니스 당국에서는 전염병을 철저히 숨기고 있으니, 타치오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지. 그리고 나도 타치오 가족에게 신사적으로 작별을 고하고 미련없이 베니스를 떠나는 게 옳아. 하지만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죽음을 회피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이성마저 점점 마비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철옹성처럼 지켜온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기 시작한다.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도 연연하지 않고, 그 아름다운 소년에 비해 너무도 늙고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좀 더 젊고 생기 있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정교하게 메이크업을 고치고, 기능성 화장품을 발라 눈가와 뺨과 입 주위에 깊게 패인 주름살까지 없앤다. 그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던 이발사는 아셴바하의 ‘분장’을 마친 후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선생님은 아무 염려 없이 사랑에 빠지셔도 됩니다!” 전염병으로 점점 시들어가는 도시의 끔찍한 분위기와 달리 아셴바하의 얼굴은 점점 더 젊고 생기 있고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오월 중순경 베니스에서 같은 날에 부두 노동자와 여자 채소장사의 병들어 검게 변한 시체에서 그 끔찍한 병균이 발견되었다. 그 사건은 비밀리에 붙여졌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10건이 되고, 20건이 되고, 30건이 되었으면 나중에는 여러 구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 그렇게 해서 이 수상 도시의 재난에 관한 최초의 소문이 독일 일간지에 나게 되었다. 베니스 당국은 이 도시의 위생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답변했다. 그러고는 꼭 필요한 대비책으로 소독을 실시했다. 그러나 야채와 고기, 우유 같은 음식물도 감염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정을 하고 사실을 숨겨도 죽음이 골목 구석구석에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 감염자의 100명 중 80명은 죽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 그래서 피가 역청처럼 끈적끈적해지고 환자는 경련을 일으키고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질식해 죽게 된다.
-토마스 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5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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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