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5회
세상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싶은
“정말 대단한, 정말 굉장한 그림이었네.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어.”
(…)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 살결은 열정에 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 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가면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고 있는 어둡고 텅빈 우주를―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138쪽.
예술에 사로잡혀 자신의 정체성조차 망각한 스트릭랜드의 신비한 매력은 예술가들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매료시킨다. 스트릭랜드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그녀는 남편에게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해버린다. 아무도 예상 못한 결과였지만, 스트로브는 사랑하는 아내 블란치를 내쫓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자기 집에 둔 채, 스스로 떠난다. 스트릭랜드는 블란치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화가의 모델’이자 육체적 관계의 대상으로써 그녀를 철저히 이용한다. 스트릭랜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몸이 아주 근사했소. 그래서 난 그 여자 누드를 그리고 싶었지. 그런데 다 그리고 나니까 여자에게 흥미가 없어지더군.”
스트릭랜드는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예술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욕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블란치와 동침하면서도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에조차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관능을 믿지만 사랑은 불신한다. 관능이 자연스러움의 일종이라면 사랑은 사회적 구속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사랑의 의미부여’에 그는 뿌리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 사회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훌륭한 아내와 함께 살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 어떤 예술적 영감도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욕정’이라는 무기로, ‘반려자’라는 명분으로 남성을 구속하는 존재라고 단정한다.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가 그렇게 한 여자를 살뜰히 이용하고 착취하는 동안, 사랑에 빠진 그 여자는 대답없는 사랑에 지쳐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가족의 굴레, 사랑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예술의 유토피아를 발견했다면, 아셴바하는 예술가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랑의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예술가로 성공했지만 늘 가슴 한 구석에 깊은 상실감을 안고 살아왔던 아셴바하는, 관능과 유혹의 도시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운명적 사랑을 만난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무엇보다도 평생 격조 높은 삶을 살아왔던 자기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그는 타치오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타치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움직인다. 그 커다란 섬 안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그 섬이 오직 타치오와 자신만이 존재하는 무인도처럼 느껴진다. 그는 평생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살아왔지만 타치오 앞에서라면 그 어떤 명성도 부귀영화도 하찮게 느껴진다. 그는 사랑하는 이에게 말 한 마디 걸 수 없는 사실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아무리 사랑의 고통이 크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일 그 자체의 기쁨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소년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셴바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오두막들 뒤쪽에 있는 좁은 판잣길에서 소년을 따라잡았다. 그는 소년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싶었다. 그 어떤 말 한마디, 상냥하게 들리는 프랑스어 한 구절이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때 그는, 어쩌면 빨리 걸었기 때문이겠지만, 자기 심장이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양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으며, 이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는 단지 주눅 든 듯 떨면서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갑자기 자기가 너무 오래 아름다운 소년의 뒤에 바짝 붙어서 걸어온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 그래도 아셴바하는 다시 한 번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는 체념하며 고개를 숙인 채 그냥 지나쳐갔다.
-토마스 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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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