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4회
어느 개인주의자의 사랑
사랑에는 또한 약한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 잘해주고 싶고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기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걸 몹시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겸양이 존재한다. 스트릭랜드에게서는 그런 성향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159쪽.
자기애가 지나친 나머지 좀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스트릭랜드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예술에 미치고, 자신에게 미치느라, 타인에게 미칠 여유가 없는 사람. 사랑스런 사람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기꺼이 작아지고, 때로는 비참해질 수조차 있는 겸양의 심정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 사람. 스트릭랜드는 그런 타인을 향한 순수한 몰입의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경험은 무한한 축복이다. 불공평하게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선물 같은 사랑’이 찾아올 때가 많다. 자신에게밖에 집중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은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들’을 향한 여성들의 열광은 바로 ‘자신을 결코 사랑해주지 않는 대상’을 향한 신비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렇듯 무한이기주의를 철저히 신봉하는 스트릭랜드에게도 드디어 사랑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그 사랑의 주인공은, 스트로브의 부인 블란치였다. 의지할 데 없는 가난뱅이 예술가 지망생 스트릭랜드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한 사람,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스트릭랜드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준 스트로브. 스트릭랜드의 실질적 스폰서였던 바로 그 스트로브의 부인, 블란치가 스트릭랜드를 직접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며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블란치는 처음에 스트릭랜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보인다.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오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 같다며, 엄청난 적대감을 보이던 블란치. 스트릭랜드를 향한 그녀의 공포는 아마 ‘자신이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대상’에 대한 무의식의 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블란치는 마치 폭격에 맞은 사람처럼 사랑이라는 재난에 온몸을 맡기고, 철저히 상처입는다. 스트릭랜드는 ‘사랑의 단맛’만을 취한 채 ‘사랑의 쓴맛’은 철저히 외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명해지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척척 해냈던 아셴바하. 철저한 자기관리의 달인이었던 그에게도 어처구니없는 사랑이 찾아온다. 몸이 약했던 그에게는 베니스의 더운 날씨와 습한 공기가 치명적이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베니스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는 왠지 이번이 마지막 베니스 여행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며칠 머물지도 않았던 베니스가 마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듯한, 절박한 향수를 느낀다. 건강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베니스를 떠나며 그는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자기 안의 소중한 그 무엇이 무참히 잘려나가는 듯한 아픔. 그는 그 슬픔의 기원을 비로소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베니스를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이유가, 호텔에서 만난 미소년 타지오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재난인지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엄청난 불행이지만, 비할 바 없이 내 마음에 드는 불행이라고. 자신의 아들뻘밖에 안 되는 소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중년 남자의 슬픔. 그 슬픔도 그가 진정한 사랑을 찾은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는 그 끔찍한 불행마저 달콤하다고 느낀다. 그는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위험천만한 모험을 기꺼이 선택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임을.
방금 전 깊은 비탄에 잠겨 영원히 작별을 고한 곳을, 운명적으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와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보게 되다니! 그것은 묘하게 믿어지지 않는 창피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꿈같은 모험이었다. (…) 정오쯤에 그는, 타치오가 빨간 리본이 달린 줄무늬 아마직 정장을 입고 바다 쪽에서 해변 개폐문을 통과하여 (…) 되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셴바하는 사실 그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그 키만으로도 바로 그 애를 알아보고는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보아라, 타치오, 너도 역시 다시 여기에 있구나!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느슨한 인사말이 그의 마음의 진실 앞에 무릎을 꿇고 쑥 들어가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피가 끓는 듯한 감동, 기쁨, 영혼의 고통을 느꼈다. 그러고는, 그에게 그 이별이 그다지도 어려웠던 것이 바로 타치오 때문임을 알았다.
-토마스 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472~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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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