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3회
세상의 저편, 예술과 사랑의 도피처
스트릭랜드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뼈와 살가죽뿐이었다. (…) 덥수룩한 턱수염에 길게 자란 머리칼, 늘 실제보다 커 보이던 이목구비가 앓고 난 뒤엔 더욱 두드러져 기이한 모습으로 보였다. 어찌나 기이한지 못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못생겼지만 어쩐지 범상치 않은 데가 있었다. (…) 얼굴에는 야수적인 관능이 어려 있었다. (…) 그의 관능성에는 야릇하게 영성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원시성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목신 사티로스처럼, 반인반수의 형상으로 의인화했던 자연의 불가해한 힘들을 그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감히 신과 대적하여 노래 실력을 겨루려고 했다가 신으로부터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벌을 당한 마르시아스가 떠올랐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138쪽.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도망친다. 문명의 질서 저편 야생의 광기. 정돈된 일상 저편의 절도 없는 생활. 가족의 보살핌이 없는 철저한 고독 속으로. 요컨대 스트릭랜드는 현대인, 문명인, 도시인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모든 미디어와 절연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아무런 미디어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예술가에는 중요한 능력이다. 세상의 어떤 소음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 스트릭랜드는 그렇게 오직 그림에만 집중하며 사회적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면적 탈주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른다. 그는 아무런 경제활동 없이 오직 그림 그리기만으로 버티려 하기에 얼마 안 가 무일푼이 되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무리하게 그림 그리기에만 매달린다. 급기야 영양실조 상태로 쓰러져버린 스트릭랜드. 화가 더크 스트로브가 이 딱한 사정을 알아내고 그를 돕기로 한다. 더크는 자신의 집에 스트릭랜드를 데려가 그를 간호하고 싶어 한다. 더크의 아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아내가 강력하게 반대하자 더크는 열정적으로 천재 옹호론을 펼친다. “여보, 그 사람은 천재라니까. 당신은 설마 나를 천재로 생각지는 않겠지. 나도 내가 천재였으면 좋겠어. 천재를 볼 줄은 알지. 천재를 정말 진심으로 존경해. 세상에서 천재보다 굉장한 건 없어. (…) 천재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해주고 참을성 있게 대해주어야 해.”
동화처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일탈을 꿈꾸던 에셴바흐. 그는 낭만과 열정의 도시 베니스에 도착한 후, 호텔에서 정말 동화처럼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년을 만난다. 그는 자신이 그 소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틈만 나면 그 아름다운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상한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아름다움의 모든 이상향을 소년에게 투사한다. ‘가시 뽑는 소년’처럼 사랑스러운 곱슬머리, 에로스의 아름다운 얼굴, 소크라테스가 사랑했던 미소년의 이미지까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해변에서 웃고 떠들며 행복해하는 그 소년, 타지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이상하게도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 격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하면서.
비할 바 없이 숭고하고 준엄한 표정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고수머리를 한 그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 깊숙한 곳에서 내려온 귀여운 신과 같이 아름다웠으며, 이제 그 모습이 바다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이 신화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 광경은 마치 태초의 시간, 형식의 기원과 신들의 탄생에 관한 시학 자체와도 흡사하였다. 아셴바하는 눈을 감고 자기 마음 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기가 마음에 들고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아셴바하는 자기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그 쉬고 있는 소년을 지켜주기 위해서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463~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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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