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vs 『베니스에서의 죽음』 2회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은가?
“나는 그려야 해요.”
“승산 없는 도박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두 눈에 야릇한 빛을 띠고 있어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 내 나이쯤이면 모험을 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는 벌써 청년기를 넘기고 버젓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중권 중개업자이며, 아내와 두 아이까지 거느린 사람이다.
(…) “하기야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 훌륭한 화가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걸 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난 그려야 해요.” 그는 되뇌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달과 6펜스』, 민음사, 2009, 68~69쪽.
그렇게 멋들어지게 떠나왔는데,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면 어떨까. 모든 걸 버리고 떠나왔는데,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고 그를 찾아 나선 젊은 작가 ‘나’의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었다. 스트릭랜드의 사람 됨됨이에 대한 궁금증도 컸지만, 도대체 그가 ‘뭘 믿고 떠났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가로서 성공하기에 찰스 스트릭랜드는 너무 나이도 많고, 경험도 없으며, 재능 또한 인정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직접 만나고 나서야 이 의문을 풀게 된다. 스트릭랜드의 고민은 ‘내 재능으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은 물에 빠진 사람이 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절박한 것이었다. 잘 그리냐 못 그리냐가 아니라 그릴 수 있느냐 그릴 수 없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를 계산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너무 절박해서, 너무 절실해서,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가족을 버린 나쁜 남자라는 타인의 시선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스트릭랜드.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점점 부드러워진다. ‘나’는 스트릭랜드의 목소리에 담긴 진솔한 열정에 감명을 받는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것 같은 정신 나간 표정 뒤에는 그림을 향한 순수한 정열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을 애타게 찾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가련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려 한다. “부인께 안 돌아가시겠단 말인가요?” 스트릭랜드는 소름 끼치도록 단호하다. “절대 안 돌아가요.”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할 수 있다는 부인의 회유에도, 사람들이 당신을 비열한 인간이라 욕한다는 협박에도, 스트릭랜드는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스트릭랜드를 포기한다. 대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괴짜 예술가 지망생을 ‘관찰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화가라는 직업’이라든지 ‘예술가의 명성’이 아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매혹된 이 중년의 사나이. 그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에셴바하도 어떤 불가해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작가로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에셴바하는 권태와 매너리즘에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드높은 자존심, 습관적인 일중독 때문에 제대로 ‘쉬는 법’을 알지 못했던 에셴바하. 그는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기질을 지닌 공간을 떠올린다. 정돈과 통제와 합리와 질서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곳. 그의 머릿속에는 섬광처럼 ‘베니스’라는 여행지가 떠오른다. 그는 생애 최초로, ‘명성’이 아닌 ‘휴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기 위한 ‘도구’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쉼 그 자체를 위한 쉼이었다. 무언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비우기 위한 여행. 그는 지칠 대로 지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계산 없는 휴식임을 깨달았다. 그 휴식을 위한 여행에서 뜻하지 않은 ‘열정의 대상’을 만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가 명성을 추구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사실 조숙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색깔이 분명하고 개성이 확실한 덕분에, 진작부터 그는 세상에 능숙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엔 자리 책상에 앉아서 세상을 향해 품위 있게 행동하고 명성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많은 요구들이 성공한 작가이자 신뢰할 만한 작가인 그에게 들이닥쳤기에 짧은 편지글에서도 호의를 보여주고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 이미 젊은 시절부터 사방에서 업적을 기대했기에 그는 단 한번도 빈둥대거나, 젊은 시절을 아무런 염려 없이 방종하게 보낸 적이 없었다.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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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시네필 다이어리』,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